청주(靑州,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본래 아첨하고 남을 속이기를 잘하였다고 한다. 궁예(弓裔)가 참소(讒訴)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같은 청주 사람인 입전(笠全),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이를 추궁하였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하다가, 913년 왕건(王建, 태조)이 아지태가 모함한 사실을 밝혀내어 그를 처벌하였다. 이 일로 왕건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으나, 왕건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길 구하였다.
이른바 ‘아지태 사건’은 태봉 내부의 정세가 변화하고, 918년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파악된다. 궁예와 왕건의 정치적 지향이 서로 달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청주의 인호(人戶)를 대거 철원으로 사민(徙民)시키고, 청주 출신 아지태를 곁에 둔 사실은 궁예의 정치적 지향과 관련하여 청주 지역의 동향이 중요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청주 지역 내에는 아지태와 같이 궁예의 뜻에 동조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치적 갈등은 태봉의 정치적 목표가 후백제와의 전쟁을 우선으로 하는가, 신라를 점령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청주는 태봉이 남쪽으로 후백제와 신라로 진출하는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해상을 통해 후백제와의 전쟁을 주도하였던 왕건 등 패서(浿西) 호족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아지태 사건은 결국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사건이었다.
아지태와 대립하였던 청주 세력을 반정부 세력으로 보거나,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당시 왕건이 궁예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아지태 사건 이후로 왕건이 즉위할 때까지 청주 지역 내에는 서로 다른 입장의 세력들이 병존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건도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동향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