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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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물품
유율타악기(有律打樂器)의 하나.
이칭
이칭
구라철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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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유율타악기(有律打樂器)의 하나.
내용

일명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 불리며, 조선 영조대 청나라에서 들어와 주로 민간의 정악연주에 사용되었다. 악기분류법에 따르면 사부(絲部) 또는 현명악기(絃鳴樂器)에 속한다.

사다리꼴의 판면(板面) 위에 두 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벌의 금속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가는 채로 줄을 때려서 맑은 금속성의 충격음을 얻는다.

몸통은 오동나무판을 사용해 상자모양으로 짜서 만들고, 줄은 중국산의 주석과 철의 합금을 상품으로 친다. 보관할 때 줄을 보호하기 위해 뚜껑을 만들어 덮는데, 연주할 때에는 이 뚜껑을 양금의 몸통 아래에 깔기도 한다. 뚜껑도 역시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여기에 화리(華梨: 紫檀의 목재로 붉은 빛이며 결이 곱고 단단해 가구·미술품 등에 사용함)를 붙이기도 한다.

양금은 원래 회교음악에 사용하던 악기였는데,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의 십자군원정 기간 유럽에 전파되어 중세 이후 유럽 각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 뒤 제수이트파(Jesuit派)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명나라 신종 8년(1580년) 중국에 들어오면서 이 악기를 휴대해와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것이 영조 무렵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권28 망양록(忘羊錄)과 『연암속집(燕巖續集)』 권42,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 등에 의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에 도입된 양금은 즉시 향악음정에 맞추어 조현되고, 풍류방에서 정악연주 악기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영산회상」의 연주와 가곡반주에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단소와의 병조는 음색의 영롱함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양금은 두괘 위에 철현(鐵絃) 4줄을 1벌로 해 모두 14벌이 각 괘 위에 7벌씩 놓이는데, 왼쪽 괘의 왼편과 왼쪽 괘의 오른편, 오른쪽 괘의 왼편만을 실제 연주에 사용하고 오른쪽 괘의 오른편은 사용하지 않는다.

각 줄은 곡철(曲鐵)이라고 부르는, 시계태엽을 감는 도구와 같은 것으로 음을 고르는데, 먼저 오른쪽 괘 왼편의 제5현을 임종(Bb)에 맞추고 다음은 옥타브관계를 이용하여 맞추어 나간다[그림]. 조현이 모두 끝나면 [표]와 같이 된다(*표는 실제 연주에 사용하지 않는 줄).

[표] 양금조현표

구분\현 1 2 3 4 5 6 7
왼쪽괘 왼편 疥*
왼쪽괘 오른편 林* 南* 無*
오른쪽괘 왼편
주 : *는 실제 연주에 사용하지 않는 줄.

이와 같이 줄을 고르는데 고선(姑洗: 동양에서 쓰는 12율 가운데 다섯 번째 음이름)음이 없기 때문에 「영산회상」 중 군악의 연주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근에는 제3현과 제4현 사이에 고선줄을 하나 더 얹기도 한다.

양금의 연주법은 거문고나 가야금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데 『구라철사금자보』에 의하면 단격(單擊: 채로 한 번 침)·양격(兩擊: 채로 같은 줄을 두 번 침)·연격(聯擊: 채로 같은 줄을 연해서 치되 한 번 친 다음 곧 채머리를 줄 위로 숙여 트레몰로와 같은 효과를 냄)이 있었다.

현재 양금 악보로는 『구라철사금자보』·『유예지』·『일사금보』·『서금보』·『서금가곡』·『방산한씨금보』 등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한국악기대관』(장사훈, 한국국악학회, 1969)
『국악논고』(장사훈,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3)
집필자
변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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