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중류지역으로 강굽이에 의한 퇴적현상이 심해 여러 겹의 고운 모래로 넓게 덮여 있다. 이 유적은 팔당댐 수몰지역 조사로 1970년 11월에 연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구석기유물은 비행장이 있던 지역에서 주로 채집되었다. 엇갈림떼기를 한 반암 자갈돌의 안팎날 찍개, 부엌 조리용 연모인 규암 자갈돌의 긁개, 오목날을 가진 새기개, 오리냐시앙식 잔손질을 베푼 둥근 밀개 등이 발견되었다.
발굴조사는 5개의 구덩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제1구덩에서는 갈철·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뿌리테가 찾아졌다. 제3구덩에서는 단단한 덮개로 된 산화철층이 찾아져 기후가 더웠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발굴을 한 제4구덩과 제5구덩에서는 민무늬토기·덧칠토기, 가락바퀴와 그물추, 긁개, 눌린 자국이 있는 민무늬토기조각, 흙으로 만든 단추, 거푸집 등이 찾아졌다. 여기에서 발견된 민무늬토기는 일반적으로 고운 염토에 석영질 모래를 섞어서 그릇을 빚는 민무늬토기시대의 전형적인 토기와는 달리, 바탕흙으로 고운 염토와 모래염토를 같이 사용하고 있어 그릇연구를 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또한 입술부분은 단지모양 그릇에 해당되며 가락동·역삼동 주거지에서 나온 토기들과 생김새가 비슷해 서로 비교가 된다.
민무늬토기 밑부분에서는 낟알자국과 지문이 있는 확인되었다. 낟알자국은 콩이나 팥의 자국으로 이 때에 이미 잡곡을 경작했음을 알 수 있다. 지문은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이 때에는 여자가 토기를 많이 만들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고운 염토를 써서 구멍에 실을 꿸 수 있도록 한 흙으로 빚은 단추는 선을 찍어 사람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어 예술수법이 꽤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거푸집은 굵은 석영·장석·모래질을 섞어 만든 것으로, 전체 높이는 1.5㎝이지만 녹인 금속물이 넘지 않도록 테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주조된 물건은 주로 허리띠 장식이나 치레걸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연대는 제4구덩의 표토 밑 80㎝ 되는 토기 빚던 곳에서 출토된 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2,670±70B.P가 나왔고, 다시 나이테연대측정을 한 결과, 2,850B.P가 나왔다. 따라서 이 유적은 이른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