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순조 2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인후(金麟厚) · 이이(李珥) · 정철(鄭澈) · 김시서(金時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김인후가 강학하던 훈몽재(訓蒙齋) 곁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6년(고종 13)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이에 김인후와 이이의 위패는 순창향교에 매안(埋安)하였고, 정철의 위패는 창평 동강서원(東江書院)에, 김시서의 위패는 본서원터에 매안하였다.
그 뒤 1950년 6·25의 전화로 훈몽재마저 소실되어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건물로는 사우(祠宇) · 내신문(內神門) · 훈몽재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전사청(典祀廳) · 고사(雇舍) · 대문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