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조(泉太祚)’라고 하기도 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버지이다. 손자인 연남생(淵男生)의 묘지에는 그의 성씨를 ‘천(泉)’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 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조는 물(水中)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연(淵)이란 성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남생묘지에 의하면 아버지 자유(子遊)는 최고위 관직인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으며, 태조 역시 막리지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대로(大對盧)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는 제 1위의 관등이고 막리지는 최고위 관직인데, 양자가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막리지에서 대대로로 승진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기 힘들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가 동부(東部, 또는 西部라고도 함) 출신으로 대인(大人)이었다고 하는데, 5부 중 동부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뒤에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부병(部兵)을 모아놓고 사열을 하는 것처럼 꾸미다가 여러 대신들이 손님으로 오자 이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때 동원한 부병(部兵)도 동부의 병사가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죽자 아들 연개소문이 그 직을 이으려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 그 승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이러한 귀족들의 견제에 대해 정변을 일으켜 귀족들을 숙청하고 연개소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