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괴시동 고분군 ( )

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고분들은 영해읍 동편의 동해에 접한 산지에서 송천(松川)에 의해 형성된 영해읍의 북편에 펼쳐진 넓은 들을 바라보며 서북으로 뻗은 낮은 구릉에 분포한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과거부터 함경도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한 기착지로 볼 수 있는 곳이며 지금까지 이 교통로상에서 발견된 고분군 가운데는 가장 대규모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괴시리 고분군에는 봉분의 직경이 20여 미터에 이르는 대형 고분 19기와 다수의 소형분이 밀집되어 분포하는데 대부분 도굴된 상태이다. 1985년 이들 가운데 16호분이 도굴되어 고분군의 현황 및 그 성격을 구명하고자 1986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이를 발굴하였다. 출토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내용

발굴된 16호분은 선축된 11호분의 둘레돌(護石)에 덧붙여 축조된 것으로 11호와 함께 표형(瓢形)을 한 2사람무덤[兩葬墳]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남아 있던 봉분은 직경, 높이가 18×4m의 원형으로 봉토의 기저부를 따라서는 반원형의 둘레돌이 열을 지어 있었다. 봉토는 사질토양과 마사토를 번갈아가며 1겹씩 수평으로 쌓아올렸다. 내부에서는 1기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 발견되었다. 이 돌무지덧널무덤은 길이 6.2m, 너비 5.1m, 깊이 2.0m의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의 커다란 무덤구덩이[墓壙]를 파고 그 내부에 안덧널[內槨]과 바깥덧널[外槨]의 2중으로 된 덧널[木槨]을 설치한 것이다. 바깥덧널과 무덤구덩이 벽 사이는 비교적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채웠다. 안덧널과 바깥덧널 사이 남북의 단벽측에는 비교적 작은 돌을 채운 석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자갈을 1∼2겹 깔아 순장공간을 마련하였고, 동서의 장벽측에는 돌을 채워 석단을 마련하였으나 다른 시설물은 두지 않았다. 안덧널의 크기는 길이 3.2m, 너비 1.8m였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바닥시설을 마련하였다. 이 덧널의 목재가 들어갈 공간에는 자갈이 깔리지 않았고 그 너비가 20∼30㎝ 정도인 점으로 미루어 덧널에 사용된 목재의 너비를 알 수 있는데, 꺾쇠를 사용하여 결구하였다. 남북에 설치된 순장부는 양자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북쪽의 순장부는 길이 3.4m, 너비 1.1m 가량 되었다. 순장부의 바닥 높이는 안덧널 바닥보다 1m 정도 높았다. 바깥덧널의 위에는 나무 뚜껑을 덮었고 그 위에 약간의 돌을 깔고 무덤구덩이 바깥으로 일정범위까지 돌을 쌓아 돌무지를 마련하였다. 돌무지 위에는 점토로 피복을 한 다음 봉토를 쌓아올려 무덤을 완성하였다. 안덧널에 매장된 주피장자는 북침을 하고 있었으며 덧널의 남과 북 양측에 유물을 부장하였다. 그리고 남측의 순장부는 잘 남아 있지 않아 거기에 순장된 사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북측에 순장된 사람은 서침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도굴로 인하여 많은 유물이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안덧널에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접시[蓋杯], 연질바리 등의 토기류와 유리구슬목걸이 일부가 남아 있었다. 순장부에서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등의 토기류와 투겁창[鐵矛], 미늘쇠, 낫 등의 철기류, 가는고리귀고리[細環耳飾]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크기와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원래는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었을 것이나 도굴되어 그 조합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 토기 가운데는 이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재지양식의 토기, 경주에서 유입된 경주양식토기, 의성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성양식토기가 혼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앞으로 이 지역의 문화적 성격을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이 축조된 시기는 5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경주지역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대형분이 주부곽식에서 외덧널식[單槨式]으로 변해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당시 영덕지역을 관할하던 지역집단의 최고지배자로 볼 수 있는데, 묘제와 출토유물로 볼 때, 이 피장자는 신라에서 동해안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이용할 때 신라에 적극 협조하였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영덕 괴시동 대형분의 피장자들은 대대로 같은 성격을 가지며 존속한 집단의 사람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영덕 괴시리16호분』(국립경주박물관, 1999)
「영덕 괴시동 제16호고분 발굴보고」(국립경주박물관, 『영남고고학』2 휘보편, 1986)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