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은 가로 · 세로 모두 53㎝(52×52.4㎝ 혹은 54×54㎝란 기록도 있다)의 정방형이다. 그리고 가로 21행(行), 세로 24간(間)의 정간(井間)을 만들어 총 471자를 음각하였다.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다. 1927년 중국 허난성 뤄양(洛陽) 동산령(東山嶺)에서 출토되었는데, 1940년 서안(西安) 비림(碑林)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기의 자(字)는 홍업(洪業)이며, 본관은 낙랑(樂浪) 수성(遂城)이다.
묘지에 기록된 그의 세계(世系)를 살펴보면, 6대조는 파(波)로서 전연(前燕)에서 의동삼사 무읍공(儀同三司 武邑公)을 지냈다. 그리고 고조부 반(班)은 산기상시 평서장군 급사황문시랑 진양후(散騎常侍 平西將軍 給事黃門侍郞 晉陽侯)를 역임하였다.
증조부 정국(定國) 때부터 북위에서 벼슬을 해서 고부금사중 관군장군 하내태수 병주자사 박평남(庫部給事 冠軍將軍 河內太守 幷州刺史 博平男)을 지냈다. 그리고 할아버지 당성(唐成)은 광무장군 동궁시랑 합비자(廣武將軍 東宮侍郞 合肥子)를 지냈다.
또한, 아버지 광조(光祖)는 영원장군 서주장사 회양태수 사주중정 진양남(寧遠將軍 徐州長史 淮陽太守 司州中正 晉陽男)을 역임하였다. 항주치중 진양남(恒州治中 晉陽男)을 지낸 왕정(王禎)은 그의 형이다.
왕기는 482년에 광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생 벼슬하지 않고 지내다가 522년 2월에 42세의 나이로 뤄양 영강리(永康里)에서 사망하였다. 이듬 해 10월에 뤄양의 수양산(首陽山) 금문(金門)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묘지는 이 때에 부장된 것으로,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밝혀져 있지 않다. 특히, 왕기의 묘지명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낙랑 수성인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낙랑군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왕기의 가문이 낙랑 수성현에서 나왔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왕기 이외에 뤄양에서 묘지(墓誌)가 발견된 왕기의 형 왕정(王禎, 475∼514)과, 왕도민(王道岷)의 두 딸인 원원평(元願平)의 처 왕씨(王氏, 480∼509)와 원빈지(元斌之)의 처 한씨(韓氏, 482∼513) 등이 모두 낙랑 수성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북주서(北周書)』에는 북주문제(文帝)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와 그의 오빠인 왕맹(王盟, ?∼545)도 그 선조가 낙랑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왕씨들은 모두 6대조가 동일한 인물인 왕파(王波)로서 동일 가문 출신이었다.
이들 낙랑 왕씨가 언제 중국으로 이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왕파가 전연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낙랑군 멸망(313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낙랑 왕씨 중 왕파의 후손들이 중국 북조(北朝)의 귀족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이 대대로 관직과 관작을 가지고 있었음은 왕기의 가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왕도민의 두 딸과 혼인한 원원평과 원빈지가 각각 경목제(景穆帝)와 문성제(文成帝)의 손자임을 보면 낙랑 왕씨는 북위의 황실과 혼인할 수 있는 유력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왕기의 묘지명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조전승 기록이다.
즉, 왕씨의 선조가 은나라의 기자(箕子)이며,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성(姓)을 ‘왕(王)’으로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기자의 후손일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낙랑 왕씨는 중국계 왕씨와는 달리 고조선 이래의 지배세력으로서 낙랑군 설치 이후에도 지배세력으로 남아있었다.
아마 이들은 기자와 관련된 시조전승을 차용해 그 지위를 정당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왕기 묘지는 낙랑군 유민의 묘지로서 낙랑 왕씨의 가계 의식은 물론, 중국으로의 이주 이후 정치적 활동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