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은 가로, 세로 모두 36.3㎝로, 정방형의 전석(塼石)이다. 머리 행(行)은 7자(字), 지문은 6행으로 각 행마다 8자씩 43자를 음각하였다.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나 더러 행서의 느낌을 주는 자획도 보인다. 묘지의 개석은 본래 없었던 듯하다.
왕서는 낙랑 수성인(樂浪 遂城人)으로 뤄양[落陽]에서 묘지가 발견된 왕정(王禎, 475∼514) 및 그의 동생 왕기(王基, 482∼522)를 비롯하여, 『북주서(北周書)』에 보이는 북주 문제(文帝)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와 그의 오빠인 왕맹(王盟, ?∼545) 자매 등과 동족일 가능성이 높다.
왕서의 자(字)는 진수(進壽)이며, 부인은 모용씨(慕容氏)였다. 아마도 낙랑 왕씨가 선비족 모용씨에게 투항한 이후 북위대에도 모용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서는 530년 9월에 뤄양[落陽] 북망산(北芒山)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지는 이 때 부장한 것이다. 묘지의 내용에서 특이한 것은 樂浪을 ‘樂梁’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기록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용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