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화원창(花園倉)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현(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면 일대)에 있었다. 본래 화원창은 성주목의 경내에 자리한 인흥사(仁興寺)라는 사찰의 창고를 빌려서 성주목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던 창고였다. 이후 세조 연간에 성주목 읍내 남쪽에 별도로 창사를 건립하였다. 성종 연간에 왜국 사신이 가지고 온 물품을 저장하면서 화원창은 왜물고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 1) 대마도(對馬島) 정벌 이후 중단되었던 대외 무역은 1423년 부산포를 필두로 하여 삼포(三浦 : 부산포(釜山浦, 富山浦), 제포(薺浦), 염포(鹽浦))를 개항하면서 재개되었다. 이 때부터 영리를 목적으로 내왕하는 왜인의 수는 해마다 급증했고, 그들이 가지고 오는 물화도 대단히 많았다. 조정에서는 왜인들을 빨리 귀환시키기 위해 물품 대금은 국고나 관수물(官需物)로 우선 지급하였다. 그리고 왜물은 개항장의 창고에 수납했다가 일부는 현지에서 상인에게 매각하고, 그 밖의 것은 전부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현지 매매에 따른 잠상(潛商)들의 불법 행위와 서울까지 수송하는 데 징발되는 농민들의 피해가 많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를 막기 위해 1472년(성종 3) 육상과 수상 교통의 요지인 화원현에 왜물고를 설치하고, 삼포의 왜물은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해 이곳에 운송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왜물 중 국가 소용품은 농한기에 육로로 한강 상류까지 운반하고, 이곳에서 다시 선편으로 서울의 용산에 수송하였다. 그 밖의 물품은 민간에게 매매하였다. 이를 화원현 무역이라 하는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중간 무역이었다. 화원은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으로부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7, 8일 후에 도착되는 곳으로, 국초(國初)부터 군자미곡(軍資米穀)을 저장하였다.
왜물고에서 거래된 물목으로는 구리 · 철 · 소목(蘇木) 등이 있었다. 삼포의 왜관에서 유입된 왜인의 물품들은 대부분 왜물고에 저장되었다. 왜인과 물품을 거래하던 상인들은 거래한 물품을 왜물고에 저장하도록 하여 화원현에서 직접 거래하도록 하고 그 대가(代價)는 사섬시나 호조에 직접 납부하도록 하여 이를 상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478년(성종 18) 이후 삼포에 물품을 두고 상인이 가서 바꾸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가 폐단이 적지 않게 발생하자 다시 전례에 따라서 1493년(성종 24)부터 화원현의 왜물고를 통한 매매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