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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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전투전적비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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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6사단이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용문산일대에서 방어하여 큰 타격을 입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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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6사단이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용문산일대에서 방어하여 큰 타격을 입힌 전투.
내용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공세 시 사창리에서 시련을 겪은 후 용문산(1157고지) 일대에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5월 공세를 개시하여 혈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제19병단 제63군 3개 사단(제187, 제188, 제189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인 국군 제6사단 지역을 공격해 왔다.

국군 제6사단은 당시 북한강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기도가 감지되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가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두능산에서 주저항선으로 각각 철수함으로써 제2연대만이 청평호 남쪽에 남게 되었다.

연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창리 전투의 결과로 연대장과 일부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연대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하였다. 연대의 정찰대는 17일 적의 예상도하 지점을 탐색하던 중 이미 도강하여 방하리 계곡에 집결중인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하였으나, 일몰이 되어 대규모의 적이 북한강의 도처에서 도하를 기도함으로써 자대로 복귀하였다.

1951년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인 제2연대를 향해 몇 차례 도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제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지원받아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하였다. 중공군은 이곳 전초진지를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부터 제187, 제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하여 돌파를 기도하였다.

중공군은 우전방 공격에 이어 이번에는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하여 좌전방 제2대대의 울업산을 집중 공격하였다. 제2연대는 나산 일대 전초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틀간의 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또 식량과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2연대의 전황을 간파한 중공군은 19일 야간에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백병전으로 점철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연대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강력한 정신력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제6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던 제2연대와 연결한 후 즉시 반격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20일 07:00부터 18:00까지의 전과만도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과 소화기 312정에 이르렀다. 반면 이날 국군 제6사단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단은 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다. 이로써 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불명예를 씻고 설욕할 수 있었으며, 용문산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참고문헌

『6·25전쟁사』제9권(군사편찬연구소, 2012)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6)
『현리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8)
『용문산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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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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