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회는 『우란분경』을 근거로 하여 지옥과 아귀보를 받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법회이다. 『우란분경』은 목건련(目?連)이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을 받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도한 효성의 덕을 기린 경전이다. 중국 육조시대에 양무제가 동태사(同泰寺)에서 우란분회를 설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에는 예종이 1106년에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바라면서 이 재를 베풀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1398년(태조 7) 7월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이 재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에도 각 사찰에서는 7월 15일을 백중날이라 하고 의식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도 한다. 오람바나(烏藍婆拏, Ullambana) 또는 도현(倒懸)이라고도 번역한다. 『우란분경』은 부처님의 수제자인 목건련(目犍連)이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을 받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도한 효성의 덕을 기린 경전이다.
목련존자가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그 열린 혜안(慧眼)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았더니, 어머니는 아귀보를 받아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목련은 자기가 얻은 신통력으로 어머니를 아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업(業)이 두터워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에 목련은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줄 것을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의 자자일(自恣日)인 7월 15일에 과거와 현재 7세(世)의 부모를 위하여 부처님과 승려에게 백 가지의 음식과 다섯 가지의 과일 등을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면 비원(悲願)의 성취는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도 천계(天界)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목련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는데 이것이 우란분재의 시초이다.
이 법회는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양무제(梁武帝)가 동태사(同泰寺)에 행차하여 이 재를 설한 이후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우란분재를 설하였다. 이 행사는 7월 15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행하여졌고,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어 승려와 일반인들이 함께 우란분재를 설치하여 공양을 올렸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신라시대부터 우란분회가 성해 왔다는 설은 있으나, 그 의식이 행하여졌던 사실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우란분재를 595년과 657년에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연대는 신라의 진평왕과 무열왕 때에 해당하며, 특히 6세기 말로부터 7세기 초의 기간은 이미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가 한창 뿌리를 내릴 때였으므로, 일본사에 기록된 불교적 행사라면 당연히 삼국에서도 그 의식이 행하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 재가 개설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106년(예종 1)에는 장령전(長齡殿)에서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바라면서 이 재를 베풀었고, 1109년에는 장령전에서 우란분재를 설치하여 공양을 올렸으며, 1153년(의종 7)에는 봉원전(奉元殿)에서 개설하였다.
또, 1285년(충렬왕 11)에는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1297년에는 공주와 함께 광명사(廣明寺)에 행차하여 설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에는 내전(內殿)에서 우란분재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7월 15일에 개최되었다. 이 밖에 왕실 밖이나 각 사찰에서의 우란분재도 많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전래되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고려 왕실에서 설하였던 그 의식의 절차라든가 그에 따른 기구 등에 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배불정책에 따라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서민층과 부녀자의 생활을 지배하였고, 불교행사는 여전히 중대한 행사로 민중화되었다.
특히, 사월초파일의 연등과 7월 망일(望日)의 우란분재는 1년 중에서 가장 큰 행사로 민중 속에 남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398년(태조 7) 7월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이 재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우란분재에 대하여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서는 7월 15일에 백 가지의 꽃과 과일을 모아서 우란분회를 베푼다. 일반 가정집의 부녀자들이 모여서 쌀과 곡식을 바치고 돌아가신 부모의 영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승려들은 거리로 나가 중생을 위하여 탁발을 베풀었다.”고 하여 조선 초기 우란분재의 모습을 소상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 법회는 점차 일반화되고 민속화되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7월 14일의 백중날에 각 사찰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망자의 위패를 불단에 세우고 재를 모시며, 재가 끝나면 그 위패를 불사르는데, 이 의식은 일반 가정집에서 제사지내는 의식과 똑같다고 기록하였다.
현재에도 각 사찰에서는 7월 15일을 백중날이라 하고 그에 따르는 의식법회를 진행하여 오고 있다. 결국, 목련의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풀어진 우란분회가 현재는 백중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서 그 법요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백중일은 백종(百種, 百經)이라고도 불리는데, 원래 이날은 매년 4월 15일부터 시작된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다. 그 때 의심이 있으면 스승에게 물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대중에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날이기 때문에 백중일(白衆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백종은 7월 15일에 농민들이 농사일을 거의 마치고 휴식을 하면서 한자리에 모여 노는 풍습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