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원빈(元賓)이다. 일찍이 판중추부사 민부(閔富)에게 양육되어 성명을 민덕생(閔德生)으로 바꿔쓰다가, 벼슬에 나가 사역원부사(司譯院副使)가 되어 본래의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중국어에 능하여 1403년(태종 3) 계품사(計稟使)의 통사(通事)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14년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의 통사로서 명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아왔다. 1417년 하정사(賀正使)의 통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많은 물건을 실무역한 것이 탄로나서 투옥되었다. 곧 석방되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왜구문제 처리에 힘썼다.
이듬해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명에 가서 양위의 전말을 알리고 왔다. 1419년(세종 1) 명나라에 백후지(白厚紙) 2,000장을 진헌하고 왔으며, 1423년 중군총제·우군총제를 역임하였다.
안주선위사를 여러 번 역임하였다. 1425년에는 평양선위사를 지내면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우리나라를 자주 내왕한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과 교분이 두터워 외교활동에 기여한 공로가 컸다. 그 뒤 사역원제조·동지중추원사·인순부윤(仁順府尹)을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전후 21회에 걸쳐 명나라를 내왕하였는데, 역관으로 14회, 정사·부사로 7회였다. 명나라 태종(太宗)이 현인비(顯仁妃)의 인척이라 하여 후대하여, 원민생이 주청하는 일은 거의 윤허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특히 우대하여, 품계를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려주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