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탈환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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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국군 제1군단이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1950년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한 전투.
내용 요약

원산탈환전투는 국군이 1950년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한 전투이다. 당시 원산에는 북한군이 각지에서 후퇴한 패잔병을 합류시키며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늘어난 북한군의 병력은 최소 2만여 명이었고 전차 12대, 122미리 곡사포, 76미리 곡사포 3개 대대, 120미리 박격포 8문, 82미리 박격포, 76미리 직사포 76문 등으로 무장했다. 이에 국군은 동쪽의 원산비행장과 서쪽의 여왕산으로 부대를 나눠 공격하다가 원산 시내에 모여 공격한 끝에 원산을 점령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양민을 학살하였는데, 600여 구의 시체가 방치되고 있었다고 한다.

목차
정의
국군 제1군단이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1950년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한 전투.
내용

북한군은 1950년 10월 초 원산을 요새화하고 각지에서 후퇴한 패잔병들을 합류시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최초 원산지역 방어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단행할 무렵인 9월 중순경에는 제588보병연대가 담당하여 연대본부와 제3대대는 원산시가지에, 제1대대는 갈마반도의 원산비행장에, 그리고 제2대대는 흥남에 배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많은 패잔병의 집결과 가용부대의 증가로 더 많은 방어부대를 배치하였다.

원산일대에 재편성한 병력은 최소 2만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들은 전차 12대, 122미리 곡사포, 76미리 곡사포 3개 대대, 120미리 박격포 8문, 82미리 박격포, 76미리 직사포 76문 등으로 장비되어 있었다.

10월 10일 새벽, 드디어 국군 제1군단의 원산공격작전의 막은 올랐다. 원산을 점령,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시가를 감제하는 2개의 고지군을 점령하여야만 하였다. 이러한 지형특성과 양개 감제 고지군을 고려하여 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우일선의 제3사단에게는 시가 동단의 고지군을, 좌일선의 수도사단에게는 시가 중심부 서측방에 우뚝 솟아있는 여왕산을 최초의 공격목표로 각각 부여하였으며, 양 사단이 이들 목표를 점령한 다음에는 원산시 중심가를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협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작전의 진행과정에서 원산시내에서의 양개 사단간의 전투지경선이 불투명한데다가 사단 상호간에 원산시를 먼저 점령하려는 경쟁심으로 말미암아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시가에서 두 번씩이나 서로 교차진출하게 되는 등 사단간의 전투지경선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산시 동단에 포진하고 있던 제3사단의 선봉 제23연대가 10일 05:30에 제일 먼저 공격을 개시하여 각종 구경의 야포, 박격포 사격과 76미리 자주포 5대의 지원을 받아 완강히 저항하는 적의 방어선(원산조차장∼73고지∼원산비행장을 잇는 선)을 격파하고 07:00에는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이 날 아침 신고산쪽 배화를 출발한 수도사단의 기갑연대가 제3사단의 진격로를 횡단하여야만 진출할 수 있는 갈마반도의 원산비행장을 목표로 제3사단 전투지대 측방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기갑연대는 189고지∼136고지 산 속의 과수원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적의 전차포 3문과 직사포의 포격으로 진출이 저지되었다. 여기에서 일제 트럭을 이용하여 장갑차량 기동타격부대로 가장하여 적진을 돌파해 온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의 제1대대는 원산비행장으로 돌진하고, 연대는 제3사단 제23연대를 후속하여 시가전을 전개한 후 원산시 동반부를 확보하였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제26연대장 이치엽 대령은 여왕산 산록에서 만나 군사지도도 없이 일반지도상에 그려진 작전투명도를 서로 대조하면서 전투지경선 문제로 옥신각신한 끝에, 제18연대는 계속 여왕산을 공격하게 되었으며, 제26연대는 원산시의 서남쪽을 차단하였다.

국군이 원산시내에 들어갔을 때 무참히 학살당한 양민의 시체가 부둣가에 수십 구를 비롯하여 여왕산 기슭 신풍리 방공호에 300여 구, 원산 앞바다에 230여 구 등 도합 600여 구의 시체가 방치되고 있었으니 그들의 동족에 대한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처참한 원산 학살시체 발굴 작업은 당시 뉴스 영화 촬영대가 촬영하여 공개하였다. 약 9만 명에 달하는 원산 잔류시민들은 그 동안의 학살, 피랍 등 엄청난 곤욕을 당하면서도 국군의 원산입성을 기다렸으며 원산이 탈환되자 국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참고문헌

『6·25전쟁사』제9권(군사편찬연구소, 2012)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한국전쟁사』(육군사관학교, 1986)
『한국전사』(합동참모본부, 1984)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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