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의 손자 윤정지(尹廷之)가 수집하여, 1648년(인조 26)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종손인 함경감사 윤이지(尹履之)와 함께 간행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중간되었다. 권두에 명나라의 웅화(熊化)가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김상헌(金尙憲)·윤신지(尹新之)의 발문이 있다.
7권 4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 고려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국역본 『월정집』이 있다.
권1∼3에 시 508수, 권4에 소(疏) 14편, 잡저 12편, 권5에 서(序) 14편, 기(記) 3편, 서(書) 16편, 권6에 묘지·묘갈명 12편, 권7에 제문과 애사 등 19편이 있다. 끝에 있는 『조천록(朝天錄)』은 1589년(선조 22) 저자가 공조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올 때 지은 기행시를 모은 것이다. 명나라 육가교(陸可敎)의 서문과 함께 129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명나라의 웅화가 보내온 서(書)·별장(別狀) 각 1편과 습유로 칠언율 1수가 있다. 웅화는 서에서 “시는 거의가 나라 사랑과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맑고도 우아하면서 깊이가 있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다. 문에는 임진왜란에 관계된 것과 전사자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모두가 사실적이고 취사(取舍)에 오류가 없어 옛 양사씨(良史氏)의 기풍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시 중에는 임진왜란과 관계된 것들이 많다. 역시 왜란으로 인한 잔인하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전쟁 이전의 태평성대를 그리워하는 감회가 서사적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우재각진소회차(遇灾各陳所懷箚)」는 재앙을 멎게 하는 방법으로 이미 허통(許通: 서얼의 과거 응시나 관직 진출을 허락하는 것)한 자로서 노장학(老莊學)을 했거나 서얼이라 하여 사소한 이유로 관작(官爵)을 말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환징북병이송남방계(還徵北兵以送南方啓)」는 길주·단천 등지의 북병을 모두 남방으로 보내어 왜적의 재침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어호방략차(禦胡方略箚)」는 북쪽 오랑캐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적격한 장수의 선택이 급선무이므로 신병사(新兵使) 변응성(邊應星)을 해직하고 곽재우(郭再祐)로 하여금 서추(西陲)를 지키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 왕수인(王守仁)은 문묘에 오를 수 없다고 주장한 「문묘종사의(文廟從祀議)」 등이 있다. 「조공일군순의비(趙公一軍殉義碑)」에는 왜란 당시 금산싸움의 전세와 다수의 순의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