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일찍이 훈련원선전관을 지내고, 1501년(연산군 7)에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수의 적임자를 선발할 때 유순정(柳順汀) 등 3인의 문신과 함께 11인의 무신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1503년에 사재감첨정에 올라, 윤대(輪對)를 통하여 평안도의 연대군(煙臺軍)이 매우 미약하고 허술함을 밝히고 그 강화책을 건의하여 실현시켰다. 그러나 이듬해에 무과전시에서 어전배좌(御前背座: 임금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서 시험을 봄)하였다고 질책을 받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 뒤 불평불만으로 지내다가 1506년에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중추부의 요직을 역임하고, 1508년(중종 3)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서는 부산첨사 이우증(李友曾)과 함께 왜구토벌에 힘썼다. 특히, 가덕도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던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큰 공로를 세워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졌다.
그 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전임하여 방어사목(防禦事目)을 수립하고, 1515년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서해안방비에 힘썼다. 이듬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압록강 연안 야인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군비 강화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