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첨(伯瞻). 유수(柳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광식(柳光植)이다. 아버지는 유자(柳滋)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행(李荇)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83년에는 스승인 이이·성혼의 무고를 밝히는 소를 올렸다. 이해 곧 풀려나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철(鄭澈)이 세자책봉문제로 귀양가자, 같은 당파라 하여 경원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세자시강원보덕을 겸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사간·사복시정·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4년에는 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596년에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이 되었다.
그러나 일시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동지방의 사정에 밝다 하여 1599년에 강원도의 조도 겸 독운어사(調度兼督運御史)에 임명되어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었으며, 전공이 인정되어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01년에는 우승지가 되고, 이듬해에는 파주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