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초명은 유장(柳蔣). 자는 언박(彦博). 유자해(柳子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양(柳壤)이다. 아버지는 유첨정(柳添汀)이며, 어머니는 홍종(洪琮)의 딸이다. 영의정 유순정(柳順汀)의 조카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 7) 식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04년 홍문관박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강원도도사를 지냈고, 1514년(중종 9) 경학(經學)에 밝다고 하여 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이어서 장령(掌令)·사간·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관기 확립과 풍속 교정에 이바지했으며, 특히 기재(忌齋)·장리(長利)의 폐단을 적극 논하였다.
그 뒤 1519년 경상도추고경차관(慶尙道推考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나 직무에 불성실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곧 홍문관응교에 복직되었다.
경연의 시강관을 겸임하면서 기강 확립을 위해서는 형벌보다는 명분을 바로 할 것과 현량과(賢良科)의 폐지를 주청하였다.
1521년 명나라 세종(世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서 집의·대사간,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27년 도승지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을 다스릴 때 생원·진사 등을 권농관으로 동원시켰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1529년 첨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명에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다시 편찬한다는 말을 듣고, 오기(誤記)로 말썽이 있던 종계문제(宗系問題)의 개정을 예부에 요구하였다.
귀국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자, 시무책을 올려 진휼(賑恤)이 급선무임을 강조했고, 시비를 밝혀 공론을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사임했다가, 지중추부사를 거쳐 1533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는데, 대간에 의해 직무에 부적합하다는 탄핵을 계속 받았다. 그러나 성균관동지사·우찬성·좌찬성을 거쳐 1537년 10월 우의정에 올랐다.
때마침 김안로(金安老)와 그 일당이 축출될 때 연루되어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판중추부사로서 물러났다. 1539년 70세로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판의금부사·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