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목 ()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조야약전』, 『해동보』, 『계당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숙빈(叔斌)
계당(溪堂), 노시산인(老柴散人)
이칭
간곡거사(澗谷居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3년(순조 13)
사망 연도
1872년(고종 9)
본관
풍산(豐山)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
정의
조선 후기에, 『조야약전』, 『해동보』, 『계당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상주 출신.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숙빈(叔斌), 호는 계당(溪堂). 유성룡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유후조(柳厚祚)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부사 이재연(李載延)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6세 무렵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달했으며, 특히 역사 부분에 재능을 보였다. 이에 할아버지 유심춘(柳尋春)이 순수 학문을 지향할 것을 경계하자 이때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1834년(순조 34) 유심춘이 사망하자 정이(程頤)의 「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의 「경재잠(警齋箴)」의 후잠(後箴)을 지어 학문과 행실의 지표로 삼았다.

1835년에는 과거응시를 위해 상경했다가 남한산성·삼전도·갑곶진을 탐방하고는 분격한 심정을 시(詩)로 표현하였다. 1842년(헌종 8)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과장(科場)의 부정을 목격하고는 상주 시리(柴里)에 계당(溪堂)을 건립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판사 정윤우(鄭允愚)의 요청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적이 물러나 곧바로 의진을 파하였다. 이듬 해인 1867년에는 동몽교관, 1868년에는 장악원주부·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68년에는 계정(溪亭)에 선비들을 모아 『소학』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강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해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저서

유주목은 성리학·예학·역사학·보학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전례유집(全禮類輯)』은 사례(四禮)·오례(五禮)·사상례(士相禮)·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다.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성리학에 대한 선유들의 견해를 취합하여 편찬한 것이다. 『조야약전(朝野約全)』은 당쟁에 대한 글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해동보(海東譜)』는 씨족의 계보를 밝힌 40책 분량의 역작이다. 문집으로는 『계당집(溪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계당집(溪堂集)』
집필자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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