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1968. 호는 범공(梵公). 서울 출신. 11세 때 서만월(西滿月)의 제자인 이범호(李梵湖)에게 홋소리를 배웠고, 그 뒤 계속하여 짓소리도 배웠으며, 서만월에게서 안채비소리를 직접 배웠다. 목소리와 음악성이 뛰어나 12세에 중강(中講:魚丈의 助手)이 되었고, 10대에 이미 일류의 어장이 되어 재(齋)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
16세 때 구례군수의 49재가 당시 500원이라는 거액으로 백련사(白蓮寺)에서 3주야간 올려졌는데, 상번(上番)을 진관사(津寬寺)에서, 중번을 화계사(華溪寺)에서, 말번을 봉원사(奉元寺)에서 각각 초청하였다.
그런데 동산(東山)의 화계사가 서산의 백련사에 와서는 짓소리를 꺼내기가 어려웠는지, 화계사의 벽봉(碧峰)이 백련사의 이범호께 범공에게 장부 좀 대주라고 이르게 하여, 16세의 어린 나이로 짓소리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지반지심(志盤至心)의 장부를 잘 수행하여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
21세에 백련사의 어장(조선 왕조 어영청의 주장)이 된 이래 여러 곳에 불려다니며 범패를 가르쳤으나 이렇다 할 제자는 남기지 못하였다. 광복 후 환속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1955년경에는 국립국악원에서 가곡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가곡과 범패가 흡사한 부분이 많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그가 아는 모든 범패를 녹음하여 국립국악원에 두었다. 또 1965년 9월에는 그가 장부가 되어 청량사(淸凉寺)에서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조사를 위한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 전 바탕을 김운공(金耘空) · 박송암(朴松岩) · 윤만순(尹萬淳) · 강동진(姜東振) · 한동희(韓東熙) 등과 함께 녹음하였다. 이 녹음은 1967년 한만영(韓萬榮)이 악보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