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라산기》는 최익현이 1875년(고종 12년) 3월에 한라산을 등정하고 한문으로 쓴 단형의 유산기(遊山記)이다. 작자의 문집인 『면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유한라산기?는 한라산을 등정하게 된 동기와 등정의 경위를 서술하면서 경치 묘사를 하고 느낌을 펼쳐 보였다. 이어서 산의 형세와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에 대하여 개괄하였다. 최익현은 실제 등반을 통하여 한라산을 신산(神山)이라고 보는 속설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한라산과 제주도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이로움과 혜택이 금강산이나 지리산보다 높다고 평하였다.
조선 말기에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한라산 기행문. 작자가 1875년(고종 12년) 3월에 한라산을 등정하고 한문으로 쓴 단형의 유산기(遊山記)이다. 작자의 문집인 『면암집(勉菴集)』에 수록되어 있다.
최익현은 1873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자 동직을 사퇴하는 상소를 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주1을 공격하였다. 그 해 11월에 호조참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오조대의(五條大義)를 높이 내걸었다. 그는 이것으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주2에 수감되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리고 제주도에 주3되었다.
최익현은 한라산이 명승이기는 하여도 주4이라 일컬어지는 신령한 산이라 범상한 사람들이 감히 유람하는 일이 드물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이 한라산의 본연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의아하게 여겼다. 최익현은 1875년 3월에 주5되었다. 그리고는 선비 이기남(李琦男) 등의 어른 십여 명과 종 대여섯 사람을 이끌고 3월 27일에 출발하여 죽성(竹城)에서 하루 묵었다. 그 다음날에 백록담(白鹿潭)을 구경하였다. 산의 남쪽으로부터 서지(西趾)로 돌아들어서 내려오다가 노숙하고 영실(瀛室) · 서동(西洞)을 거쳐 산을 나왔다.
「유한라산기」는 한라산을 등정하게 된 동기와 등정의 경위를 서술하면서 경치 묘사를 하고 느낌을 펼쳐 보였다. 이어서 산의 형세와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에 대하여 개괄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로 발전하여 온 유산기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경치의 묘사와 감정의 서술이 교차하여 극히 묘하다. 상봉(上峰)에 이르렀을 때에 최익현은 “거기에는 초목은 나지 않았고 오직 주6와 만향(蔓香)만이 석면(石面)에 깔려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주7할 만했다. 그리고 의연히 주8의 일을 잊고 주9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라고 청정한 세계를 그려 보였다.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백록담 주변을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그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한발에도 물이 줄거나 붇지를 않고, 얕은 데는 무릎까지 차고 깊은 데는 허리까지 찾으며, 맑고 깨끗하여 주10의 진애기(塵埃氣 : 세상의 속된 기운)가 없으니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청정하면서 태고적 신비를 감추고 있는 백록담의 경관을 극히 교묘하게 그려 보였다. 또한 “제주도가 외딴 섬이지만 대해(大海)의 주11요 우리 나라의 수구(水口 : 물을 끌어 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곳)며 주12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라고
“산진해착(山珍海錯)주13 중에 임금에게 진공(進供)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난다. 공경대부와 필서(匹庶 : 평민)들이 일상 사용하는 물건과 경내 6, 7만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터전이 여기에서 취해 자급자족이 된다.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함께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부분에서는 그의 경세적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최익현은 한라산을 신산(神山)이라고 보는 속설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실제 등반을 통하여 그 공리적 의미를 찾아낸 과정을 담고 있어서, 허무하고 황당한 속견(俗見)을 극복하고 참된 지식에로 나아가는 지성(知性)의 운동을 그려낸 명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