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위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신한민보 주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교육, 직업알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목사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고종 15)
사망 연도
1928년
출생지
평양
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신한민보 주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교육, 직업알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목사 ·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양 출생.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수학하고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한 친목회와 공립협회(共立協會)에 참여하였다. 또한, 1906년 11월 상항한인감리교회(桑港韓人監理敎會)의 창립 교인으로 참가했으며, 1908년 6월 오레곤주의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이어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분교]에 진학해 1916년에 졸업했고, 산안젤모의 태평양신학교(太平洋神學校)도 마쳤다. 재미 한인단체였던 국민회(國民會)의 상항지방회장과 총회장대판[대리]을 거쳐,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교포 언론활동에도 참여해 1910년경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발행한 월간 종교잡지 『대도(大道)』를 주재하였다. 또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편집에도 관여했고, 국민회 총회장 재임시에는 신한민보의 주필도 겸하였다.

특히, 1915년 인터타이프(Intertype) 한글 식자기를 발명해, 신문의 발행을 원활하게 하였다. 『신한민보』는 1970년까지 이 식자기를 사용해 발행되었다. 또, 종교활동도 활발히 전개, 1911년부터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이민 초기의 한인사회에서 이민 자녀에게 한글을 교육했으며, 사진 혼인을 주례했고, 이민교포들의 숙소와 직장을 알선하는 등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후에는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관련해 이승만(李承晩)과 워싱턴에서 회합하기도 하였다.

성격은 강인하면서도 청렴하고 겸손했고, 직접 몸으로 희생했던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서 죽었으며, 사이프러스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제국시기신문연구』(최기영, 일조각, 1991)
『미주이민 100년』(민병용, 한국일보사출판국, 1986)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1959)
『新韓民報』(1915.3.11., 1926.11.18., 1928.6.21., 1928.6.28.)
집필자
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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