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인 ()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용산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군택(君宅)
용산(龍山)
이칭
만호(晩濩)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4년(순조 34)
사망 연도
1897년(고종 34)
본관
진보(眞寶)
출생지
안동
정의
조선 후기에, 『용산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안동 출신. 본관은 진보(眞寶). 초명은 만호(晩濩), 자는 군택(君宅), 호는 용산(龍山). 이황의 11세손. 아버지는 통덕랑 이휘교(李彙喬)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로 조병주(趙秉周)의 딸이다. 영양 주실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42년(헌종 8) 단산군수(丹山郡守)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이효순(李孝淳)을 시종하면서 학업에 열중해 12∼13세 무렵에는 경사에 통달하였다. 1846년 승지 김두흠(金斗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850년 도산서원 고강(考講)에서 『서경(書經)』을 강해 이휘령(李彙寧) 등 좌중의 원로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한동안 과업에 종사했으나 1872년(고종 9)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77년 원근의 선비들이 수학하기를 거듭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제생들에게 강학하였다. 이 해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81년에는 영남만인소의 소본(疏本)을 기초했으며, 1890년에는 동종을 회합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는 한편, 이만도(李晩燾) 등과 더불어 향음주례 의절을 강론하여 정하였다. 1892년에는 예천의 오천사(浯川榭)에서 『대학』을 강하고, 1893년에는 영주향교에서 『소학』을 강하였다.

이후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세가(世家)의 후손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이휘령·이휘재(李彙載)·이만각(李晩慤)·금익명(琴翼明)·김재숙(金載琡) 등 당시 안동·예안 유림의 원로들을 두루 종유하였다. 특히 스승인 이휘재와는 서면을 통해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깊이 토론했으며, 금익명과는 『중용』·『대학』의 의문점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이만인은 이황의 학설을 금과옥조로 여겨 이와 배치되는 이이의 사칠주기설(四七主氣說)과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용산문집(龍山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용산문집(龍山文集)』
『서파집(西坡集)』
집필자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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