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1899년 비서원승이 되었다. 1900년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서북철도국 의사장·중추원의관·내부협판으로 발령 받았고, 1902년 혜민원 의정관을 겸임하였다. 1904년 내부대신 서리로 임명되었고, 1905년 남산 왜장대에서 러일전쟁 해전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축첩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관련 혐의로 일본 헌병사령부에 체포·구금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의병진과 고종의 연계를 의심한 일본헌병대에서 측근 관료를 체포한 것이었다. 이 해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7년 봉상사제조·제실회계심사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자위단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일진회에서 조직한 자위단원호회의 간사원을 맡았다. 1908년 동양화재보험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한성 미동에 봉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해 10월 일본적십자사로부터 유공장을 받았다.
1909년 이완용이 일진회 주도의 ‘합방’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명의로 합방을 추진하여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조직한 국민연설회의 간사원을 맡았고, 백완혁·엄주익 등과 함께 10만원을 마련하여 합방청원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등박문송덕비 건설을 위한 협의회의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1912년까지 주식회사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이사를 지냈다. 1910년 이재극(李載克)·이하영(李夏榮) 등과 대한작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농무조합 부조장과 위생회 부회장, 평화협회 실업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2년 일본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였을 때 상장 2,000개를 민간에 무료로 배급하였다. 또한 이 해 제당회사 조선측 발기인, 주식회사한일은행 이사, 조선상업은행 감사역을 역임하였다. 1913년 화폐재정정리사업에 대한 금융상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이 해부터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유공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