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신생활사그룹, 민중사,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명
RST, 김춘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제주도
주요 작품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 –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왼편을 향하여
주요 경력
『독립신문』 기자| 『신생활』 기자|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조선지광』 책임자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2007)
내용 요약

이성태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상해에서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후, 신생활사그룹과 민중사 등에서 활동하면서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당 기관지로 지정된 『조선지광』의 책임자를 겸하였다. 소련으로 망명한 후 스파이 혐의로 총살되었다가 복권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신생활사그룹, 민중사,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인적 사항

이성태(李星泰)는 1901년 제주도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 후, 1919년 4월부터 경성YMCA에서 9월까지 수학하였다.

주요 활동

1920년 10월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광수(李光洙)가 주재하던 『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이광수와 함께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적을 두었다. 1922년 김명식(金明植)이 주도한 공산주의그룹인 ‘신생활사그룹’에 신일용(辛日鎔), 정백(鄭栢)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3월 『 신생활』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적자의 생존」, 「청년에게 소함」, 「크로포트킨 학설 연구」 등 크로포트킨과 관련된 일련의 글을 발표하였다.

1923년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자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 동아일보』와 『 개벽』에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 –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왼편을 향하여」 등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1923년 9월 주종건(朱鍾健), 정백, 최창익(崔昌益) 등과 함께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하였다. 민중사는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과 『임금 · 가격 · 이윤』을 번역하여 ‘민중사 팸플릿’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달에는 조선노동대회 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6월 조선공산당 조직과 관련하여 귀국한 정재달(鄭在達)과 연관되어 검거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조직부를 담당하였다. 당 대회에서 당 기관지로 지정된 『 조선지광(朝鮮之光)』의 책임자를 겸하였다. 또한 그해 4월 상하이로 가서 주1 동양부에 파견 중이던 양명(梁明)에게 조선공산당의 개편 등 당 대회의 내용과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 등을 코민테른에 보고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6월 귀국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으며, 1929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1934년 11월 만기 출옥하자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모스크바의 외국노동자출판부에서 근무하던 중, 1937년 10월 29일 일본 첩보기관의 지령으로 조선의 혁명운동을 파괴 및 반소 스파이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9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당일 형이 집행되었다. 1992년 7월 6일 최고 군사검찰의 판결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1(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
박종린, 『사회주의와 맑스주의 원전 번역』(신서원, 2018)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논문

박종린,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물산장려논쟁」(『역사와 현실』 47, 한국역사연구회, 2003)
주석
주1

공산당의 통일적인 국제 조직. 1919년에 레닌의 주도 아래 소련 공산당과 독일 사회 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창립되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다가 1943년에 해산되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종린(한남대 교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