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李星泰)는 1901년 제주도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 후, 1919년 4월부터 경성YMCA에서 9월까지 수학하였다.
1920년 10월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광수(李光洙)가 주재하던 『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이광수와 함께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적을 두었다. 1922년 김명식(金明植)이 주도한 공산주의그룹인 ‘신생활사그룹’에 신일용(辛日鎔), 정백(鄭栢)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3월 『 신생활』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적자의 생존」, 「청년에게 소함」, 「크로포트킨 학설 연구」 등 크로포트킨과 관련된 일련의 글을 발표하였다.
1923년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자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 동아일보』와 『 개벽』에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 –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왼편을 향하여」 등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1923년 9월 주종건(朱鍾健), 정백, 최창익(崔昌益) 등과 함께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하였다. 민중사는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과 『임금 · 가격 · 이윤』을 번역하여 ‘민중사 팸플릿’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달에는 조선노동대회 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6월 조선공산당 조직과 관련하여 귀국한 정재달(鄭在達)과 연관되어 검거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조직부를 담당하였다. 당 대회에서 당 기관지로 지정된 『 조선지광(朝鮮之光)』의 책임자를 겸하였다. 또한 그해 4월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동양부에 파견 중이던 양명(梁明)에게 조선공산당의 개편 등 당 대회의 내용과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 등을 코민테른에 보고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6월 귀국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으며, 1929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만기 출옥하자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모스크바의 외국노동자출판부에서 근무하던 중, 1937년 10월 29일 일본 첩보기관의 지령으로 조선의 혁명운동을 파괴 및 반소 스파이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9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당일 형이 집행되었다. 1992년 7월 6일 최고 군사검찰의 판결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