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년(선조 39) 경원판관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포도청종사관으로 있었다. 사람이 본래 음란하고 도의에 어긋난 일을 무상으로 하여 추행이 훤히 드러났으나, 징계하여 감금하지 않았기에 포도청의 위엄을 빙자하여 수절과부를 모욕, 겁간하는 등 악한 짓을 계속하여 그 행태가 사람같지 않았다.
또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큰 옥사를 일으킬 적에 공이 따르지 않자 노하여 가버린 적도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변을 일으키자 이괄의 부하로 난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괄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부원군에 봉하고 천금을 주겠다는 현상이 붙자, 기익헌(奇益獻)과 함께 이괄과 이괄의 아우 이수(李邃) 및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 한명련(韓明璉) 등 9명의 목을 베어 원수부(元帥府)에 전하였다.
이 사실로 죽음을 특별히 면제받고 귀양갔다가 수년 후 사면되어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희생당한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과, 풍천부사 박영신(朴榮臣)의 아들 박지병(朴之屛)에 의하여 대낮에 서울거리에서 목이 베어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