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Islam)

이슬람교 중앙성원
이슬람교 중앙성원
신종교
단체
610년 무함마드(Muhammad)가 창시한 종교.
이칭
이칭
회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슬람교는 610년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이다. 이슬람이란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무슬림이라 한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 알라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하고 형제애와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 내용을 포교하는 예언자였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경전이 『코란』이다. 창시 후 아라비아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되었고, 무함마드 사후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오늘날 신도 수는 세계 인구의 20%인 9억 정도이고, 이슬람국가는 43개 국에 달한다. 우리나라에도 2009년 기준으로 약 3만 5천여 명의 한국인 신도가 있다.

목차
정의
610년 무함마드(Muhammad)가 창시한 종교.
개설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 · 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도 수는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9억 정도이고, 국가 총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여 ‘이슬람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만도 43개 국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교(Islam敎) 또는 회교(回敎)로 불리며, 6 · 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터키군에 의하여 1955년 소개되어 2009년 기준으로 약 3만 5천여 명의 한국인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25세에 부호의 미망인 하디자와 혼인하여 한때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주민들은 종교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신과 신령을 믿는 복합적인 신앙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급속한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과 갈등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존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사색과 명상을 계속하던 그는 40세 되던 610년 경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띠고 포교에 나섰다. 이 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 『꾸란』이다.

그러나 보수적 전통이 강한 메카 지도층 코레시아족의 탄압으로 포교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622년 9월 메카 북방 400㎞ 지점의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 메디나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부르고 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이주한 무하자룬(교도)과 그 지역 협력자들을 모아 최초의 움마(교단)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를 강화하여 나중에 이슬람국가로 발전시켰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방대한 아라비아지역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한 그는 632년 6월 메디나에서 죽었다.

처음부터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 성격의 공동체는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성전(聖戰지하드)에 임하여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는데, 예언자가 죽은 뒤 한 세기도 안 되어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를 걸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자가 급속히 늘어갔는데, 이는 신도공동체인 움마내에서는 절대평등을 인정하나 타종교신봉자에게는 인두세를 물리는 등 공적인 차별대우를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뒤 훨씬 더 대중적으로 이루어진 이슬람의 2차 확장은 12세기 이후 모슬렘신비주의자인 수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 터키, 사하라 일대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그 밖에도 무슬림 상인들은 원거리무역으로 인도 동부연안과 인도네시아 · 말레이시아 · 중국 사람들을 개종하는 데에 촉매역할을 해냈다. 이슬람교는 여러 인종과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져 있던 거대한 지역에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인 내적 차이를 하나의 종교공동체로 포괄함으로써 일체감을 부여해주었다.

특히, 세계사에 있어서 동서대륙의 세계문화 교량역할을 담당하였고, 중세유럽 암흑기에는 그리이스 · 로마의 고전문명을 훌륭하게 보존하여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제국주의 세력에 대처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점차 종교적 · 정치적 · 사회적 제도간에 갈등을 빚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후반 식민종주국으로부터 얻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일과 이슬람공동체를 현대화하는 일로 인하여 서구엘리트와 종교전통고수자 사이에 많은 마찰이 발생하였다.

현재 이슬람교는 여러 가지 해결할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이슬람국가를 결속하고자 범아랍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하여 현재도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본신앙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또, 『꾸란』은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무슬림일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이렇듯 실천을 강조하는 이슬람신앙은 대체로 칠신(七信)과 오행(五行)으로 요약된다.

칠신은 알라 · 천사 · 경전 · 사도(使徒) · 내세 · 정명(定命) · 부활에 대한 믿음이며, 오행은 오주(五柱)라고도 하는데, 신앙고백 · 예배 · 쟈카드(救貧稅) · 단식 · 순례의 실천을 말한다.

우선 믿음을 보면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근본을 이루며, 알라가 모든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라는 정명관신앙(定命觀信仰)과 신은 하나이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라는 신앙고백선언이 핵심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아담 이후의 노아 · 아브라함 · 모세 · 이삭 · 예수 · 무함마드는 모두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도로서 여겨진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기독교에서와 같은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에서의 원죄설도 부인한다. 무함마드는 최후심판의 날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최후의 사도로서 종래의 모든 예언자의 활동을 보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에 따른 다섯 가지 주요 의무가 있다. 첫째,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느님의 종임을 확인한다. 둘째, 예배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드리고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예배를 드린다. 셋째, 자기수입의 2.5%를 세금으로 헌납하는데, 이것은 국가재정의 기본일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인다.

넷째, 단식으로 성년무슬림은 매년 이슬람력 아홉번째 달인 라마단기간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 음식 · 음료수 · 담배 · 성행위와 같은 일체의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는 금욕생활을 행한다. 라마단월(月)이 끝나 새 달을 맞게 되면 화려한 의상을 입고 거리로 나와 성대한 축제를 가진다.

다섯째, 성지순례로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이슬람력 12월 9일경을 전후하여 메카순례의 의무가 있다. 하느님 앞에서 완전평등이라는 이러한 생활실천은 세계의 방대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또한 음주 · 간음 · 돼지고기 · 고리대금 · 거짓말 등은 무슬림의 계율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한편,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일부다처제는 이슬람지역의 빈번한 전쟁으로 과다하게 발생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보인다. 이슬람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란』과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이지만, 계속된 영토확장으로 그것만으로는 이슬람공동체를 이끌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공동체내에서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에는 전통적 규범인 순나(Sunnah)에 의해 보완된다. 순나를 지지, 이상시하는 자를 순나파라 하는데 대부분의 무슬림은 이 정통파에 속한다. 제국확장과 함께 이질적 종교와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최초의 하라지리파를 비롯, 많은 분파가 생겼는데, 그 중 주요한 하나의 분파가 바로 시아파이다.

이 파는 초기 칼리프시대 이후 칼리프계승권에 대한 문제로 발생한 분파이다. 시아란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칼리프계승권이 예언자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게 있다고 하면서 알리의 아들 하산과 후세인의 계승권을 주장한다.

이 시아파는 순나파에 비하면 소수파이지만, 한 때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페르시아가 사라센 제국에 복속된 뒤에 정통 순나파를 선택하지 않고 시아파를 선택했던 역사적인 연원 때문에 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체 무슬림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은 자기들만이 성스러운 지식과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힘의 소유자를 이맘(Imam)이라고 불러 존경하고 있다. 또 다른 주요한 유파는 12세기 이후 이슬람신비주의라 일컬어지는 수피즘을 들 수 있다.

수피란 원래 원시이슬람사회 내에서의 금욕수도자 · 고행자를 뜻하였으나, 뒤에 그리스사상과 유대교 · 기독교 · 불교의 신비주의사상까지 수용되어 수피즘이라는 독특한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결과만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샤리아)에 대해 반발하면서 신앙의 내면성을 더욱 강조한다.

무슬림들에게 우리나라가 알려지게 된 것은 거의 1,000년이 넘는다. 서기 850년 경에 나온 중 · 근동의 사서(史書)와 지리서에 이미 신라(al-Shiilá,ah-Silá)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은 유럽인의 우리나라에 대한 최초 기록보다 500∼6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한자문화권 밖에서는 최초로 언급된 기록이다. 무슬림과의 접촉기록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나타난다.

고려 때인 1024년(현종 15) 9월에 열라자(悅羅慈, Al-Raga) 등 100여 명, 다음 해 하세라자(夏詵羅慈, Hassah Raga) 등 100여 명과 1040년(정종 6) 11월에 보나합(保那蓋, Barakah) 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대식(大食: 중국음으로 Tashih, 페르시아어로 아랍족)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回回: 중국음으로 Hui-Hui)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回回敎)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시 중동 무역상인으로서 출입한 무슬림은 주로 예성강하구 벽란도에서 교역하였는데, 가지고 온 상품은 주로 수은 · 향료 · 약재 · 소목(蘇木) · 동(銅) 등이고 포도 · 포도주도 이때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가지고 간 상품은 금 · 은 · 포(布) · 면(綿) 등이다.

조선조의 등장과 함께 무슬림상인의 출입이 사라졌으나 문화적 교류는 중국을 통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세종 때에 편찬된 역법서(曆法書)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슬람의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을 소개한 것이다.

15세기 경에는 중 · 근동측 기록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기록에도 무슬림상인들의 우리 나라 출입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의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무역권이 급격히 쇠퇴한 것과 동북아시아의 정세변동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무슬림과 재접촉한 곳은 만주이다. 일제가 만주경영을 위하여 한국인들을 반강제로 만주에 이주시킨 결과 그 수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

이 중 극소수는 그 곳에 정착한 무슬림과 접촉, 이슬람을 알게 되고 일부는 그 때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일제 패망 뒤 귀국하여 뒤에 우리 나라 안의 이슬람 정착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터키군이 6 · 25전쟁 때 참전함을 계기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이슬람과 다시 접촉하였다.

당시 터키는 우리나라에 1개 대대를 파병하였는데, 이 속에 터키군의 군목인 이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서 개종한 몇몇 한국인들이 터키군을 찾아가 성금요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무슬림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1953년부터는 한국무슬림을 위한 특별기도회가 터키군 내의 간이모스크에서 이루어졌고, 1955년 9월에는 정식으로 한국무슬림 예배개막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55년 10월에 한국이슬람협회(Korea Islamic Society)가 결성되어, 터키군 이맘이었던 압둘 라흐만과 주베르 코치가 이맘으로 선출되었고 초대 회장에 김진규, 사무총장에 윤두영이 취임하였다.

또한, 그 해 서울 동대문에 독자적인 예배장소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협회 대표 2명이 1959년부터 1년간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을 비롯한 여러 무슬림국가들을 직접 살펴보고 한국이슬람의 실정을 소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62년 한국무슬림 유학생 11명이 처음으로 말레이시아 클랑무슬림대학에 파견되어 6개월 동안 이슬람교리와 의식을 공부하고 귀국, 선교에 종사하였다. 또한, 이 협회는 기구확대와 더불어 1965년 1월에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Korea Muslim Federation)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 연합회는 1967년 3월에 문공부로부터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의 설립을 인가받아 한국무슬림을 대표하는 공식기구로서 법적 지위를 얻었다. 1970년대 아랍국가와의 관계가 번번해지면서 정부가 이슬람중앙성원의 건립대지를 기증함에 따라 이 연합회는 중 · 근동의 무슬림독지가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정부와 무슬림독지가의 노력으로 1976년 5월 서울에 중앙성원이 완공되어 21개 무슬림국가에서 51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이 중앙성원에는 한국무슬림의 의식교육과 선교를 담당하는 이슬람센터도 발족하였는데, 현재도 아랍어 공개강좌를 계속하고 있다.

1970년 후반에는 중동에 진출한 많은 한국근로자들에게 이슬람을 선교하기 위해 최초의 해외지회를 제다에 설치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경기도 광주군 쌍용리마을의 일부 주민들이 자진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밝혀 임시성원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1980년 초 경기도 광주에 또 하나의 성원이 준공되었으며, 부산에도 성원이 건립되었다.

1980년 가을에는 한국이슬람사상 처음으로 132명이라는 대규모 성지순례단이 메카를 순례하고, 그 곳 황태자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또한, 1980년 5월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방문하여 국왕 할리드와의 회담에서 한국에 이슬람대학을 설립하는 데 양국 원수가 상호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 협의에 따라 한국정부는 대학부지를 제공하고 그 기공식까지 가졌다. 이렇게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는 한국 내 이슬람 포교뿐 아니라 절대 다수가 비무슬림인 한국민에게 생소한 무슬림 세계를 소개함으로써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였고, 나아가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여 양측의 친선과 우호증진에 이바지하였다.

1970년대부터 연인원 100만 명에 달하는 한국근로자들이 중동에 진출하였으며, 한국은 문화적 · 경제적으로 무슬림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1950년대에 탄생된 한국이슬람이 이런 관계가 이룩되는 데 여러 가지 긍정적인 작용을 해왔다.

1994년 현재 한국에는 약 10만 명의 신자가 있는데, 그 중 한국인은 4만 명 정도이다. 이 숫자는 총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나 계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서울 중앙성원과 부산 알파타성원, 경기도 광주 성원 이외에 1986년에 안양 성원과 전주 성원이 개설되어 전국에 5개의 성원이 산재해 있으며 7개의 해외 지부를 두어 선교 활동의 발판도 구축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는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학설립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아랍어 연수원과 출판위원회 등이 있어 연수원을 운영하고 『무슬림주보』, 『주간 무슬림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슬람의 종교적 특성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다종교상황이라든가, 같은 유일신앙인 기독교의 팽창이라든가 하는 종교문화적 환경이 이슬람선교에 유리한 요인은 아니다. 더구나 집단예배를 보는 금요일이 휴일이 아니며, 모스크도 거주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래서 한국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습성과 기호의 차이로 생기는 어려움과 예배의식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고, 또한 무슬림국가의 도움에 의존하여 성장하다보니 자생력이 약하여 내부적인 갈등이 계속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7)
『이슬람사상사』(김정위, 민음사, 1987)
「이슬람교」(김정위, 『한국인의 종교』, 정음사, 1987)
『이슬람철학사』(앙리 코르방, 김정위역, 대광문화사, 1986)
『이슬람문화사』(김정위, 문학예술사, 198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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