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이희목(李希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존실(李存實)이다. 아버지는 증 호조판서 이덕손(李德孫)이며, 어머니는 유무(柳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 해 사직했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해 백성의 부담을 더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모르고 들고 온 관물(官物)인 말채찍을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 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하늘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부하들이 몰래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 강물에 던진 투갑연(投甲淵)의 일화는 유명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임)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저서로는 『노촌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