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이색(李穡)의 현손이며,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숙묘(李叔畝)이고, 아버지는 목사 이원증(李元增)이며, 어머니는 유영(柳穎)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헌납을 거쳐 지평에 올랐다.
1459년 정효상(鄭孝常)·김종직(金宗直)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고, 이어 장령을 거쳐 1463년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이 되어 세조의 문화정책에 기여하였다.
이듬해에는 집의로 재직하면서, 저화(楮貨)의 유통을 금지하고 포화(布貨)와 전폐(錢幣)의 유통을 주장하는 여섯 조항의 시폐(時弊)를 논하는 소를 올려 문명을 떨치고 동부승지에 올랐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좌부승지가 되고, 1469년 예종 즉위 직후 형조참판을 거쳐 그해 겨울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졌다.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같은해 9월에 김겸광(金謙光)과 첩을 두고 다툰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자 발분하여 38세로 요절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문사에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1463년 홍응(洪應)·김수온(金守溫) 등과 함께 『명황계감가사(明皇誡鑑歌詞)』를 번역하였고, 1465년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여 호전(戶典)을 고열(考閱)하였다. 세조가 죽은 뒤에는 『세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이 있었다. 시호는 정도(丁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