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완(子完). 여산군수 이경종(李慶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원정언 이주(李澍)이다. 아버지는 함경도관찰사 이창정(李昌庭)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이응명(李應明)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합격한 다음 해 동궁세마(東宮洗馬)로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4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의 정자로 선임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큰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나라에서 대책을 강구할 때 구휼칠조(救恤七條)의 변통책을 올려 시행하게 하였다.
뒤이어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고, 옥구현감으로 보직되자 해안가의 척박한 토지의 경작보다는 어염(魚塩)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중 삼중의 세금으로 어호(漁戶)가 흩어져 없어지게 되자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해 부담을 경감시켰다. 또 읍봉(邑俸)을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고 그 자제들을 선발해 학예를 권장하기 몇 년이 지나자, 흩어졌던 어민들이 다시 돌아와 안집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예조·병조의 정랑과 정언을 거치면서 업적을 크게 쌓았다. 그 뒤 직강·지평이 되어서는 잘못을 바로잡으면서 법을 잘 지켜 사사로움이 없었기에 인심이 숙연해지고 이완을 두려워하고 존경했다 한다. 1645년 큰 기근이 있자 인조는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해 이완에게 사무를 구관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도에 비축미를 배로 실어 보내 백성을 구제하였다.
1648년 다시 지평이 되었을 때, 영상 김자점(金自點)이 재이(災異)를 당해도 항상 있는 일처럼 말하고는 임금에게 토목사업을 크게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해 감히 말하지 못했으나, 소를 올려 재이를 참소하고 사치와 방종, 뇌물로써 기강을 문란시킨 이이첨(李爾瞻)의 죄를 극언하고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다시 지평이 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