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청도 출신. 아버지는 남해현령 이몽상(李夢祥)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에 접근하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적군의 거대한 형세에 진영을 버리고 곧 도망하였다. 이어 적군이 서남해안을 돌아 거제로 향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선과 무기를 바다 속에 침몰시키고, 수많은 군사도 흩어버리고서는 남해현의 앞 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육지를 찾아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옥포만호로서 휘하에 있던 이운룡은 원균에게,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이 지역이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임을 상기시키면서, 전라 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항언했다 한다. 이에 원균은 이운룡의 강한 항변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1592년 5월 7일,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선봉장으로서 아군을 진두지휘해 용전분격하니, 적병이 감히 대항하지 못한 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 결과 적선 50여 척을 분소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의 대전과였다. 그 뒤 사천 · 진해 · 한산양 · 안골포 · 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적군의 내양(內洋) 진출을 막아 우리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공을 크게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 · 비변사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琴湖書院)과 의령의 기강서원(歧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