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청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헌, 한성부좌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직재(直哉)
시호
공호(恭胡)
이칭
한원군(韓原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59년(세조 5)
사망 연도
1531년(중종 26)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주요 관직
대사헌|한성부좌윤|경기도관찰사
관련 사건
갑자사화|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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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한성부좌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직재(直哉). 이색(李穡)의 현손이며, 이숙야(李叔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축(李蓄)이다. 아버지는 참찬 이훈(李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표연말(表沿沫)·유숭조(柳崇祖) 등과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1491년 지평이 되고 1493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다시 지평으로 강등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집의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온건하게 처리하려다가 배척되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연루되어 장(杖) 100을 받고 직첩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1506년(중종 1) 사헌부집의로 복직되고,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대사헌·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1년 황해도관찰사, 이어서 1513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1519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하여졌다. 1521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허암유집(虛庵遺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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