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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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를 역임한 고구려의 유민.
이칭
이칭
회옥(懷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732년
사망 연도
781년 8월
출생지
당나라 평로
주요 관직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御史大夫靑州刺史)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정기는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를 역임한 고구려의 유민이다. 732년에 태어나 781년에 사망했다. 본명은 회옥(懷玉)인데 당에서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안녹산의 난 이후 당이 지방 절도사 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산동 지역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웠다. 해상교통의 독점권을 장악하고 이윤을 축적하여 강력한 절도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낙양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악성 종양으로 사망한 후 아들 이납이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중앙 조정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60여 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국왕처럼 행세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를 역임한 고구려의 유민.
개설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당나라 평로(平盧)에서 출생하였다. 778년(대력 13) 중국의 속적(屬籍)으로 바꿨다. 당나라의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로서 안사(安史)의 난 이후 산동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중앙권력의 통제권에서 이탈했으며 국왕처럼 행세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이정기(李正己)의 선조가 언제 평로에 들어와서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758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의 군인들과 함께 희일(希逸)을 군사(軍師)로 추천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평로절도사 왕충지(王充志)가 죽자 후임을 그의 아들로 삼으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가 희일을 군사로 추천한 이유는 희일의 어머니가 고모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희일의 외제(外弟)가 된다.

그 뒤, 희일과 함께 청주(靑州)로 가서 군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762년에는 전군(全軍)이 안녹산(安祿山)의 잔당인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게 되자 그도 정주(鄭州)로 갔다. 이 때 당나라의 조정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위글(Uighur, 廻紇)의 횡포가 심하자, 그는 그들의 수령을 붙들어 기를 꺾음으로써 이후부터는 방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가 대략 건원(乾元) 원년(758)∼보응(寶應) 연간(762) 사이의 일이다. 이정기는 이때 대략 26세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위덕(威德)절도사 이보신(李寶臣) 등과 서로 협력하기로 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이후, 희일이 꺼려했지만 의연한 자세와 용맹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마침내 희일이 도망을 가자 다시 군사(軍師)에 올랐다. 그가 다시 군사가 되는 과정은 조정의 의도와 상관없이 번진(藩鎭)이 사사로이 장악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당시 당 조정은 안사의 난 이후 지방 절도사세력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당 조정에서는 그에게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御史大夫靑州刺史)의 관직과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때 이정기가 받은 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은 당과 신라 · 발해의 모든 사신과 교류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정기가 이 지역에 대한 강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를 통해 이정기는 신라와 발해와의 사이에서 해상교통의 독점권을 가지고 엄청난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평로절도사 관내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막대한 부의 축적을 통해 점점 더 강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검교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서우복야(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尙書右僕射)에 가수(加授)되고, 요양군왕(饒陽郡王)으로 봉해지면서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절도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중앙 조정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엄정(嚴政)을 폄으로써 감히 그 앞에서 대화를 못하였다. 처음에 그의 근거지였던 치 · 청 · 제 · 등 · 내 · 기 · 밀 · 덕 · 체(淄 · 靑 · 齊 · 登 · 萊 · 沂 · 密 · 德 · 棣) 등의 주(州)는 전승사(田承嗣) · 설숭(薛嵩) · 이보신(李寶臣) · 양숭의(梁崇義) 등이 서로 번갈아가며 영향을 미쳤던 곳이나, 이를 모두 그의 세력 아래에 두었다.

대력 연간(大曆年間: 766∼779) 중에는 설숭이 죽고 이영요(李靈曜)가 난을 일으키자, 여러 도(道)가 일제히 그를 향해 공격하였다. 이 때 그는 조 · 복 · 서 · 연 · 운(曹 · 濮 · 徐 · 兗 · 鄆) 등 15주를 얻어 법령을 정비하고, 부세(賦稅)를 고르게 내려 가장 세력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청주에서 운주로 옮겨와서 아들 이납(李納)과 심복 장사(將士)에게 그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건중 연간(建中年間: 780∼783)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감시를 받음으로써 편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거처를 낙양(洛陽)과 매우 가까운 지역인 운주(鄆州)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에 당 조정은 변주(汴州) 성을 축조하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정기 역시 군대를 제음(濟陰)으로 이동시키고 전투태세를 강화함으로써 당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당 역시 병사 9만 2천명을 이정기가 위치한 관동(關東) 인근 지역으로 전진 배치시키는 등 이정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정기 · 전열(田悅) · 이유악(李惟岳) · 양숭의(梁崇義)가 연합하여 출병하면서 당시 수로를 이용한 경사(京師)로의 모든 물자 수송이 봉쇄되었다. 이러한 이정기의 낙양 공격은 이정기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었다.

781년 8월 이정기는 악성 종양으로 죽었는데 그때 나이는 49세였다. 아들 이납은 병권과 정권을 모두 총괄해 상을 치루고 이정기의 죽음을 한동안 비밀로 하였다가 나중에 당에 이정기의 죽음을 알리고 다른 절도사들과 마찬가지로 평로(平盧) · 치청(淄靑)절도사를 세습하도록 해 줄 것을 덕종에게 요구하였다. 흥원(興元) 원년(784) 4월 이납이 당에 항복한 후 당에 의해 이정기는 태위(太尉)로 증직받고, 아들 이납은 조정으로부터 평로군절도치청주관찰사(平盧軍節度淄靑州觀察使)가 가수되었다.

이정기 사후에도 이정기를 따르는 무리가 워낙 많았고 이 지역 번진 세력이 이미 하나의 소왕국(小王國)과 같은 존재로 성장해 있던 상황에서 이납이 이정기의 뒤를 이어 통치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 조정으로서는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이사도에 이르기까지 이정기 가문은 4대 60여 년 동안 이 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세력을 세습 ·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신당서(新唐書)』
「고구려 유민 이납의 아들 이사도에 대하여」(지배선, 『백산학보(白山學報)』74, 2006)
「고구려 인 이정기(李正己)의 발자취」(지배선, 『동방학지(東方學志)』109, 2000)
「당대 번진(唐代 藩鎭)의 한 연구(硏究)-고구려유민 이정기일가(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중심(中心)으로-」(김문경, 『성곡논총(省谷論叢)』6, 1975;『당 고구려유민(唐 高句麗遺民)과 신라교민(新羅僑民)』, 일신사(日新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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