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보(文父).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승효(李承孝)이다.
전주에 세거하였는데, 인근에 정여립(鄭汝立)이 살고 있어 그 흉패함을 미워하고, 왕망(王莽)과 조조(曹操)에 비유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당시 정여립이 요직에 앉아 극력으로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전적·해미현감·양재찰방·개성부도사로 전전하다가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1589년 이윽고 정여립이 모반하여 복주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이정란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배티고개[梨峙]를 넘어 전라도로 침입하자 스스로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는데, 군율을 엄히 하고 매일 순시를 하며 방비를 튼튼히 하니 공격의 틈을 엿보고 있던 적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태상시첨정(太常寺僉正)에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이어 군기시정을 거쳐 수원부사에 올랐고, 공주목사가 되었으나, 행정능력이 부족하고, 진휼과 농정에 소홀하다고 하여 사헌부에 의하여 탄핵,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자, 수성의 계책을 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장(明將)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성중에서는 크게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다시 조정에 읍소하여 전주부윤이 되어 성을 지켰으며 삼도소모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