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정공신(正功臣)에게는 교서와 녹권(錄券)을 주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게는 녹권만 주었다. 개국공신교서는 국왕이 직접 내리는 문서인 반면, 녹권은 공신도감(功臣都監)이 국왕의 명령에 의거해 발급해 주는 증서였다.
개국공신녹권은 1986년 국보로 지정된 이화개국공신녹권을 비롯해 몇 점이 남아 있지만, 교서는 이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최초의 공신교서 형식을 알 수 있다.
교서에서는 먼저 이것이 이제에게 내리는 교서임을 밝힌 뒤, ‘왕약왈(王若曰)’로 시작해 고려 말 정치의 난맥상과 국왕들의 부덕함, 그리고 건국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그 과정에서 이제 등이 크게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에 봉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월일을 적었으며, 그 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찍었다.
개국일등공신에게는 전각을 세워 공을 기록한 뒤, 토지와 노비를 주고, 부모와 아내에게 3등을 뛰어 봉작하고, 아들에게는 3등을 뛰어 음직을 주면서 전지와 노비, 구사(丘史), 진배파령(眞拜把領)을 지급하고, 후손에게는 영구히 범죄에 대한 사면을 약속하였다. 하사한 토지와 노비의 규모는 같은 일등공신이라도 차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토지 170결과 노비 20구를 받았다.
이제는 본관이 성주(星州)로,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우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었다. 음서로 벼슬길에 올랐다. 전법판서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제거와 태조의 즉위에 크게 공헌해 개국일등공신에 봉해졌다.
태조의 차비(次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소생인 경순궁주(慶順宮主)의 남편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으며,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거쳐 특별히 종성(宗姓)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의 일파로 몰려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살해되었다. 세종 때에 신원(伸寃)되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후사가 없어 조카 이윤(李潤)이 뒤를 이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