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인조 11)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639년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1649년에 산릉사(山陵使)로 천거되어 직무를 수행한 공로로 6품직에 제수되었다.
김육(金堉)이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준비하면서 출사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1650년(효종 1)에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어사(御史) 민정중(閔鼎重)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보은현감의 임기를 마친 뒤 1654년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부임하였지만, 임지에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였다. 1658년(효종 9)에 금천군수(金川郡守)에 임명된 뒤에는 지역의 학문을 진흥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후 1661년(현종 2)에 장성부사(長城府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임명되었다.
1668년(현종 9)에 정유성(鄭維城)의 천거를 받고 충주목사(忠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진행되던 양전(量田)의 일과 관련하여 탄핵을 받았지만, 충청도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죄가 없음을 변호하였다. 1675년(숙종 1)에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임명되었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1677년 여름 아들 이세정(李世正)이 갑자기 사망한 뒤 같은 해 10월에 이하악도 세상을 떠났다. 윤선거(尹宣擧), 박장원(朴長遠)과 오랫동안 친분이 깊었고, 송시열(宋時烈)과도 친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