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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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6사단이 1950년 7월 중순 문경 북방의 이화령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침공을 지연시킨 지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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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6사단이 1950년 7월 중순 문경 북방의 이화령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침공을 지연시킨 지연전투.
내용

수안보에서 적을 지연하다가 철수한 국군 제6사단은 금강∼소백산맥선 방어계획에 따라 소백산맥의 요충인 이화령과 조령을 포함한 문경정면을 전담하였다. 이 일대는 평균 700∼1,000m의 소백산맥 준봉들이 뻗어 있어 충주∼함창을 잇는 도로 이외에는 대부분이 산간 소로로서 도로망이 매우 빈약하였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도로상의 관문인 이화령과 조령에 주안하여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거점방어태세를 취하기로 하여 제2연대(함병선 대령)를 이화령에, 제19연대(민병권 대령)를 조령에 배치하고, 제7연대(임부택 중령)를 예비대로 삼았으며, 제16포병대대 및 공병대대 등 전투지원부대들도 일선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반면 수안보에 집결한 인민군 제1사단은 문경∼함창∼상주축선으로 진출하고자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적제2군단장은 배속된 제13사단을 이화령 서측방으로 침투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적은 주간기동에 큰 장애를 받고 있었으며, 소백산맥을 넘기 전까지는 제대로 전차를 투입하지 못하였다. 북한군 제1사단의 선두부대는 1950년 7월 13일 2개 포병대대와 함께 이미 연풍지역에 집결하여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음이 정찰결과 밝혀졌다.

7월 14일 북한군 제1사단 제2연대가 드디어 이른 새벽의 짚은 안개를 틈타서 국군 제2연대를 돌파코자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연대는 적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인하여 방어선 일부가 돌파되어 한때 밀리게 되었으나, 다행히 이화령 우전방에 제2대대가 축차적인 진지를 점령하면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므로, 포의 지원 하에 제1, 제3대대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적시에 역습함으로써 전황을 크게 역전시켰다. 적은 오히려 퇴로가 차단되자 야포 및 장갑차, 보병화기까지 유기한 채 분산도주하였으며, 제2연대는 연풍삼거리까지 추격전을 전개하여 이날 전투에서 사살 800여 명, 포로 7명, 장갑차 3대, 트럭 10대, 포 3문 등의 전과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국군 제6사단은 전선을 조정하여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조령을 점령한 북한군 제1사단은 7월 16일 주공을 문경정면으로, 조공을 사단의 양측방으로 지향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적을 맞이하여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방어진지가 돌파됨으로써 문경남쪽 남호리 일대로 철수하기에 이르렀으며, 다만 제7연대가 포병대대의 지원 하에 성주산, 옥녀봉으로 물러나면서 서측방으로부터의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이에 국군 제2연대는 부득이 이화령에서 철수하여 문경 남쪽의 남호리 일대에 저지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는 영강선으로 침공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국군은 북한군 제2군단의 주력이 상주 정면으로 침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반면 북한군은 국군의 전투력이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군사편찬연구소, 2008)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충주-점촌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92)
『청성부대사』(국군제6사단, 1981)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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