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하였다. 가산(嘉山)의 역속(驛屬)으로서 도내 굴지의 부호였으며, 체구가 장대하고 담력이 뛰어난 장사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대정강변(代定江邊) 다복동(多福洞) 깊은 골짜기를 옮겨 살면서 광산을 경영하였는데, 여기에다 사람들을 끌어들여 광산노동을 시키는 체 위장하였다가 밤이면 군사훈련을 강행하여 거사에 대비해나갔다.
홍경래가 서북지방민을 선동하여 1811년(순조 11) 반란을 일으키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그 휘하에 들어가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반란군을 지휘하였으며, 그의 군졸들이 가산 고을의 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탐관오리의 횡포와 연속된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린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평안도 각처를 점령할 수 있었으나, 증강된 관군에 쫓겨 전세가 점차 불리해졌다.
정주성으로 몰려 끝까지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어 희천의 의병 함의형(咸義衡)에게 피살되고 모반대역죄(謀叛大逆罪)로 처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