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 증조는 임석주(林碩柱), 할아버지는 임귀연(林貴椽)이고, 아버지는 임평(林枰)이며, 어머니는 김옥(金沃)의 딸 김씨이다. 아들은 명종 때 승문원정자를 지낸 임복(林復)이고, 손자는 선조 때 정랑을 지낸 문인 임제(林悌)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생들이 대궐 마당에 들어가 호곡(號哭)하자 왕은 주모자를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소를 올려 “유생들이 옥에 갇혔으니 신 등이 홀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 하고 생원으로 대학생 240여명을 이끌고 궐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왕은 갇힌 자를 석방하고 상소에 답하며 타일러 보냈다.
다음해 과거시험의 제목을 낼 때 시관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사류(士類: 조광조 등 기묘명현들)를 간사한 무리로 지칭함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어찌 차마 이 시에 글을 지으랴!” 하고 붓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1521년(중종 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고 예조참의,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52년(명종 7)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