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무백(武伯). 임한(任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임유겸(任由謙)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임추(任樞)이다.
1528년(중종 23) 유생전강(儒生殿講) 때 『대학』으로 합격하고, 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대교를 역임했다.
1533년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서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황간현감으로 쫓겨났다. 1538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거쳐 1541년 의정부검상, 이듬 해 충청도진휼경차관으로 나가 가흥창(可興倉)·아산창(牙山倉)의 곡식으로 기민을 진휼하는 한편, 수령·방백을 문책하였다.
1543년 도원수 이기(李芑)의 종사관(從事官), 사간, 황해도재상어사로 나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1544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홍문관직제학, 1545년(명종 즉위년) 우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고, 1546년 우승지·도승지·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47년 한성부우윤 때 정미조약의 체결에 반대했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1552년 경연특진관, 이듬 해 한성부좌윤, 1554년 우윤을 거쳐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556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직하고 지돈녕부사 역임 중 돌아갔다. 청정(淸淨)하고 신중함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