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혼인의 주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연애혼이라고도 한다. 연애혼은 근대 서구사조의 영향으로 도입된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나, 신라시대에는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연애혼을 행한 흔적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김춘추(金春秋)와 아지(阿之)의 혼인설화다. 이 설화에 따르면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뜰에서 놀다 일부러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떨어지게 하고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아지에게 꿰매게 하였다. 그 뒤 춘추는 아지를 가까이하여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아지를 임신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남편 없이 임신한 누이동생을 태워 죽이기 위하여 불을 피웠고, 이것을 본 선덕여왕이 김춘추에게 아지를 구하라 하여 왕의 뜻을 알아차린 김춘추는 아지와 혼례를 올렸다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의 혼인설화나 서동(薯童)의 연애설화, 그리고 강수(强首)의 혼인 등은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자유혼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자유혼의 흔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내려갈수록 약화되어, 부부관계도 애정적 측면보다 의리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실제로 『송국삼강행실열녀도(宋國三綱行實烈女圖)』나 『송국속삼강행실열녀도(宋國續三綱行實烈女圖)』 등에 따르면, 자유혼에 의한 부부는 정에 의한 의리를 지키고, 중매혼에 의한 부부는 상하질서에 의한 의리를 지키는 열녀형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개화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전통사회의 봉건질서에 반대하는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신소설 등을 통하여 신여성의 자유연애결혼사상이 보급되었다. 1920년대 자유연애에 대한 선망이 시대를 풍미한 이후,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활동 참여가 확대되는 동시에 사랑을 기반으로 한 낭만적 결혼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자유혼의 비율이 중매혼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