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예보(禮甫). 인동장씨 화원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동추(同樞)를 지낸 득만(得萬)의 둘째아들이다. 도화서 화원으로 사천현감을 지냈다.
초상에 뛰어나 1744년(영조 20) 영조어진(英祖御眞) 도사(圖寫)에 참여하였으며, 1748년에는 숙종어진 모사(模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유작으로 1745년 아버지 득만을 비롯하여 정홍래(鄭弘來)·조창희(趙昌禧)와 더불어 1744년 기사에 입사한 8인의 대신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는데, 훈염법(暈染法) 위주로 다루어지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