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장주찬(張周瓚). 전라남도 곡성 출생.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 판소리 명창 장판개(張判介)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당시 첫손을 꼽던 명창이었으나 9세 때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소리를 잇지 못하고, 14세 때 임방울(林芳蔚)로부터 2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1945년에 설립한 국악원 산하의 창극단 국극사에 입단했으며 1948년에는 창극 선화공주에서 남주인공역을 훌륭히 해내어 이름을 떨쳤고, 1952년 창극단 국악사(國樂社)에 입단하여 창극반주 악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7년 정응민(鄭應珉) 문하에 들어가 2년간 판소리 「심청가」·「수궁가」·「춘향가」·「적벽가」를 배웠다. 1960년대초 광주에서 공대일(孔大一)로부터 1년간 소리를 닦기도 하였다.
1962년에는 국립창극단에 입단, 창극공연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창극기량이 발휘되어 창극명인으로 이름이 나기도 하였다.
그의 성음은 수리성으로 기량이 뛰어났으나 성량이 약간 부족하여 그의 기량만큼이나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196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인 세종상을 받은 바 있다.
판소리 여러 바탕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춘향가」를 잘 불렀다. 동배 명창 가운데 대명창의 창법을 가장 잘 구사하였으나 아깝게도 중년에 지병으로 몸이 쇠약하여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안향련(安香蓮)을 비롯한 많은 명창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