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등과 함께 동경(東京)에서 서명되어 같은 해 12월 18일 서울에서 양국의 비준서가 교환되고 1966년 1월 17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 협정은 재일한국인의 영주권문제, 강제퇴거문제, 본국으로의 귀환 때 재산의 처리문제 등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1999년 말 현재 일본에는 52만2677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으며, 이 중 한국인은 51만7787명이나 된다. 이들 약 52만 명의 한국인은 과거 일제 36년간 일본의 식민통치기간중 일본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강제력에 의해서 일본에 이주한 사람 또는 징용·징병당해 간 사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당시 재일한국인의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은 크게 두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 중 하나는 한국농촌의 파괴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함께 실시된 토지조사 사업은 한국농촌을 파괴함으로써 한국농민들을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일본의 만주침략,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때 자국 내의 노동력부족의 해소책으로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에 ‘국민동원계획’을 세우고, 1940년에는 〈조선직업소개령〉을 실시하여 한국인 노동력의 유출을 위한 시책을 마련하고, 1942년에는 〈조선징용령〉, 1944년에는 〈조선징병령〉 등으로 한국인을 일본으로 강제동원하였다.
이상의 결과 일제통치 기간에 일본에 이주 내지 강제동원된 한국인의 수는 매년 증가하여, 1945년 광복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수는 약 200만 명에서 25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함에 따라 재일한국인은 연합국최고사령부가 마련한 공식적인 송환계획 등에 힘입어 대거 귀국하였으나, 귀국하는 재일한국인의 반출재산규제 및 여타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귀국이 종료된 1947년 이후에 일본에 남게 된 한국인은 광복 직후의 약 4분의 1인 60만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일본이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후 시행한 〈외국인등록법〉과 〈출입국관리령〉 등으로 인해 기본적 인권과 민족적·민주적 권리를 탄압, 침해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재일한국인 문제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1951년 10월 한일예비회담에서 재일교포 귀국 때 재산제한을 철폐할 것과 일본에 영주하는 교포의 권익보장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7차에 걸친 한일회담 기간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장한 끝에 1965년 6월 22일 다른 한일 제조약과 함께 법적지위협정을 타결하였다.
“다년간 일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국의 사회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고려하여 이들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국의 사회질서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할 것”(전문)을 목적으로 체결된 이 협정은, 일본정부가 광복 전부터 일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와 그들의 직계비속에 한해 영주허가신청을 기한부로 접수하여 영주권을 부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내란에 관한 죄를 비롯한 각종 범법자에게는 일본정부가 강제퇴거명령을 내릴 수 있으나, 영주를 원하지 않는 교포가 본국으로 귀국할 경우 1만 달러까지의 재산 및 자금의 소지를 인정함으로써(합의의사록) 귀국 때 사실상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올 수 있게 하였다.
‘법적지위협정’은 실질적으로는 영주권신청으로 구현되었다. 1966년 1월 17일 협정 발효와 더불어 시작된 영주권신청은 조총련의 대대적인 방해공작으로 초기에는 저조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한국정부의 열의와 재일한국거류민단의 계몽설득운동 등에 힘입어 마감일인 1971년 1월 16일에는 영주권신청자가 약 35만2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1990년대까지는 한일간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다.
첫째는 영주권신청기간 만료 후 신청기간중 무지(無知) 또는 조총련계의 방해공작 등의 이유로 신청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성묘단사업으로 이른바 조선적(朝鮮籍)으로부터 한국적으로 이전한 자가 크게 늘어 약 10만 명(1980년대 초)이 신청기간의 재설정을 요구하고, 이에 한일양국간 실무자회담을 열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못 보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출입국관리령에 걸려 고국을 포함한 해외출입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하지만 김영삼정부 이후 대북정책이 유연해지면서 재일거류민단과 조총련간에도 전 처럼 강경한 적대적 관계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
민족성과 혁명성을 내세워 일본사회에서 '현지화'를 거부해온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1999년 조총련은 일본 내 61개 조총련계 초중고교 여학생들의 치마 저고리 교복을 폐지, 블라우스 차림으로 다니도록 했다. 이는 북한의 핵의혹과 마사일 발사로 치마 저고리 차림의 여학생들이 폭행이나 놀림을 당하는 일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조총련계 상공인과 교육자들이 조총련계 학교의 교육내용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촉구하는 요망서를 조총련 본부에 요구하였고,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 부자의 우상화와 혁명투쟁사 일변도 교육의 한계를 지적하고 '공화국(북한) 공민교육'에서 '재일동포적 민족교육'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국제화시대에 맞는 인재를 육성하고 대한한국정세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는 외국인등록법에 관한 것으로 영주권신청을 마친 한국인에게 단기 일반여행자와 같이 각종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예컨대, 외국인등록증의 상시휴대와 제시의무를 부과한 점, 14세 이상의 외국인(한국인이 주종)에게 지문을 찍고 등록하게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공무원채용에 관한 것이다. 1965년의 법적지위협정의 전문에는 일본의 사회질서 아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또 일본의 공무원법도 하등의 법적 제약을 가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일한국인의 공무원채용의 길이 막혀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일본의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국민연금제도에 있어서는 국적조항을 철폐한 바 있으나, 그 적용에 있어 35세 이상된 자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리고 260개 항목에 달하는 각종 사회복지조항도 일반적 시혜가 아니므로 전면적으로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98년 김대중정부는 ‘21세기 한·일간의 새로운 파트너쉽’으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재일 한국인의 법적인 제반문제를 한 차원 높은 해결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일본도 2001년 2월 현재 한반도 등 옛 식민지 출신자와 후손 등 특별영주자의 일본 국적 취득절차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간소화하기로 기본방침을 정하였다. 최근 일본 국적 취득 신청자가 허가를 받는 기간이 1년 이상 걸리는 실정을 감안, 신청서류를 내기만 하면 귀화를 허용토록 국적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현행 국적법은 일본국적 취득조건으로 5년 이상 일본거주, 준법정신 및 사회적 의무관념을 가진 소행이 선량한 자, 경제적 자립, 이중국적을 피하기 위해 자국국적 상실 등을 규정해 놓고 있다.
법무성은 신청자가 이 같은 조건을 제대로 갖췄는지 조사하기 위해 근무처 친지 등을 직접 방문하거나 사상 및 정치활동 납세상황 등 사생활까지 조사한 뒤 국적허용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일본인 부친과 외국인 모친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일본국적을 자동 인정한 국적법 3조를 특별영주자에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작성, 2001년 정기국회에 상정할 방침이다.
특별영주자는 2차대전 종전 이전에 도일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국적을 상실한 후에도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그 후손으로, 1999년 말 현재 52만2677명중 한국-조선인이 51만7787명으로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