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 수석전권대표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과 일본정부 수석전권대표 시나(椎名悅三郎) 외상 및 수행대표들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 조약의 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 ·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 〈어업에 관한 협정〉 · 〈문화재 ·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루스벨트(Roosevelt,F.D.) 대통령에 의해서 구상되었던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는 1941년 하와이의 진주만공격을 시발점으로 하여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일본을 철저하게 약화시키고, 전쟁중 우방국가였던 소련 및 중국과 대화와 협조로써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에 의해서 구상된 이와 같은 계획은 전후(戰後) 트루먼(Truman,H.S.) 대통령에 의하여 대폭적으로 수정되었다.
첫째는 전쟁중 미국의 우방국가였던 소련이 전후에는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8개 국을 공산위성화함으로써 미국에 대하여 적대국가로 표변하고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두 우방국가였던 소련과 중국이 전후에는 미국의 적대국가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하에서 일본마저 소련과 중국의 공산세력권에 흡수되어 소련 · 중국 · 일본 간에 하나의 블록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태평양 및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동북아시아정책을 대폭 수정하여 일본을 ‘냉전의 동반자’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강화정책에 더하여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강화정책을 더욱 확대시켜 동북아시아에서 공산권봉쇄정책을 수립하고, 그 정책의 일환책으로 동북아시아에 지역협력체제를 구축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서둘러 1951년 9월 일본과 강화조약 및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회담을 추진하여 1951년 10월 한일간에 첫 번째 회담이 개최되었다.
한편, 한일 양국의 경제적인 이해도 한일회담의 추진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일본의 경우 1950년대 말 이른바 신무경기(神武景氣)를 겪으면서 일본자본주의가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한국을 포함한 해외시장에 대한 요구가 강력해지자 한일회담에 적극성을 보였다.
한국으로서도 1960년대 초 연간성장률 7.1%를 목표로 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함에 따라 거액의 외자가 필요하였으나 미국의 대한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도입원의 하나로 일본자본에 기대를 걸고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제1차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트(Sibolt,W.J.)의 주선으로 1951년 10월 21일 예비회담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부터 시작되었으나, 의제로 채택된 5개 현안 중 재산청구권문제와 어업문제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4월 21일부터 중단되었다.
제2차 회담은 1953년 4월 15일부터 열렸으나, 한국이 1952년 1월 18일 선포한 ‘인접해양주권선언’문제로 결렬되었다.
같은 해 10월 6일부터 열린 제3차 회담에서는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久保田貫一)가 “36년간에 걸친 일본의 한국통치는 한국근대화에 유익한 대목도 많았다.”고 망언하여 10월 21일 결렬된 뒤 한일교섭은 1958년의 4차 회담이 열릴 때까지 5년간이나 중단되었다.
제4차 회담은 1950년대 말 고도성장한 일본자본주의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요구를 의식한 하토야마(鳩山一郎)내각이 회담에 적극성을 보여 1957년의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 15일부터 속개되었으나, 어업문제와 청구권문제에 심한 이견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교포북송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난항을 거듭하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인한 제1공화국의 붕괴로 중단되었다.
제2공화국이 수립된 뒤 1960년 10월 25일부터 열린 제5차 회담은 5·16군사정변으로 본회담에 이르지도 못하고 유산되었다.
5·16군사정부는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을 목표로 삼고 일본자본의 도입을 위하여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회담이 재개되어 한일교섭의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나, 청구권액수 · 평화선문제 · 독도문제 등으로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원한 군사정부는 이듬해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측과 비밀회담을 가지게 한 결과 이른바 ‘김(金)-오히라(大平)메모’를 통하여 한일간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되었으며, 어업협정문제 등도 1964년 4월에 이르러 타결되어 사실상 10여 년 만에 한일회담의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제3공화국의 대일회담 자세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야당 · 학생들의 반대데모가 극심하여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한국 정세가 혼란에 빠짐으로써 회담이 다시 중단되었다가 12월에 이르러 7차 회담이 속개된 뒤 1965년 6월 22일 일본수상관저에서 기본조약을 포함한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기본조약에 의하여 한일 양국은 외교 · 영사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 및 그 이전에 양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측은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였다.
〈청구권 ·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는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교환공문)을 공여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어업협정에서는 양국연안 12해리의 어업전관수역을 설정하고, 어업자원의 지속적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정한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였다.
한편,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 의하여 재일한국인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문화재 ·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하여 일제통치기간 동안 일본으로 유출된 다수의 문화유산을 반환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65년에 한일조약이 체결되고 그 이후의 한일 양국간의 관계를 보면, 한일조약 중 두 가지의 내용이 양국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한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청구권 ·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우선 일본에는 공산당 · 사회당 · 좌파지식인 등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러한 세력들은 집권여당인 자민당 내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정세변화에 민감하게 반응을 나타내는 나라이므로 1970년대 초와 같이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냉전체제에서 데탕트체제(대립 관계에 있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어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태)로 바뀔 때에는 일본정부마저 ‘북한러시붐’을 타고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까지 모색하려 하였다.
북한은 한국이 미국 · 일본의 두 동맹국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중국 · 소련의 두 동맹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정세변화에 발맞추어 일본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관계를 맺고 북한의 경제력배양에 기여하였다면 한반도에는 한국에게 불리한 힘의 불균형이 생겼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한국이 일본의 북한접근을 견제한 것은 ‘유일한 합법정부’ 조항이다.
일본은 그 이후 북한과의 정치적 교류는 포기하였으나 결국 ‘정경분리의 원칙’에 의거, 북한과 비정치적인(예컨대 경제적) 교류는 확대해갔다. 그래서 한국은 ‘6·23선언’(평화통일 외교정책)으로 일본에게 ‘교차원칙’(북한의 우방국가인 중 · 소가 한국 접근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우방국가인 미국과 일본도 북한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을 지키도록 종용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 한일 양국간의 〈청구권 ·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1966년도부터 1975년도에 걸쳐 도입된 5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그 용도에 있어서 한일간에 다소 갈등이 있었으나, 농림 · 수산업 · 광고업 · 과학기술개발 · 사회간접자본 확충 및 서비스 부문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대일청구권자금이 1966∼1975년도 사이 한국경제운용에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이 자금에 의한 고정자본형성기여도는 제조업 3.9%, 건설업 3.8%, 농림수산업 3.7%, 전기수도 21%, 운수통신 1.0% 등이며, 총자본 재수입 중 이 자금에 의한 자본도입액의 비중은 연평균 3.2%였는데, 그 중에서 1966년도에는 28.0%, 1967년에는 10.7%에까지 달하였다.
국민총생산에 대한 기여도의 경우에는 연 1.04∼1.61%를 차지하였으며, 이 자본에 의한 국민총생산 성장률도 1970년의 최저 1.11%에서 1975년의 최고 1.73%를 기록하였다. 단기적 경상수지 개선효과의 경우 1966년도부터 1975년도 사이 이 자금의 총수입에 대한 비중이 연평균 4.3%에 달하였으며, 무역수지에 대한 경상수지 개선효과는 연평균 7.7%를 기록하였다.
1965년의 국교정상화로 인한 한일경제협력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반면 일본상품 및 일본자본의 대한수출을 촉진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대일무역 누적적자는 300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대한무역의존도가 8.3%인 데 비하여 한국의 경우 일본은 제1수입국으로 의존도 40%, 제2수출국으로 의존도 20%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대일의존도가 지나치게 심화되었음을 인식한 제5공화국 정부는 1981년 4월 일본측에 대하여 한국의 안보역할과 관련, 일본정부개발차관 60억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차관 40억 달러 등 10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한일간의 경제협력교섭은 1982년 7월 일본역사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양국간의 국민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일시 중단되었다가 나카소네(中曾根康弘)정부 수립과 더불어 타결되었으나 그 액수는 4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최대 규모로서 일본은 40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1982년부터 7년에 걸쳐 분할공여하고 자금의 구성을 일본정부개발차관 18억5000만 달러, 일본수출입은행차관 21억5000만 달러로 공여하기로 하였다.
40억 달러 경제협력 협상이 마무리됨으로써 양국은 새로운 협력정신을 바탕으로 양국관계를 재정립하여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1997년 현재까지 무역불균형 문제를 비롯한 산업기술협력 문제, 재일한국인 및 사할린교포 문제, 어업 문제 등 미해결 현안이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