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대륙붕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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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사건
1974년 1월 30일 한일간에 체결되고 1978년 6월 22일 발효된 대륙붕에 관한 2개의 협정 및 부속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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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74년 1월 30일 한일간에 체결되고 1978년 6월 22일 발효된 대륙붕에 관한 2개의 협정 및 부속문서.
내용

제주도 동남방 약 8만4000㎢의 대륙붕을 공동개발하기 위하여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는 전문 31조의 〈한일 양국에 인접한 대륙붕남부지역 공동개발에 관한 협정〉과 이 협정에 부속하는 〈합의의사록〉 · 〈굴착의무에 관한 교환각서〉 · 〈해상충돌예방에 관한 교환각서〉 · 〈해상오염의 제거 및 방지에 관한 교환각서〉 등 4개의 부속문서, 그리고 전문 4조의 〈한일 양국에 인접한 대륙붕북부지역의 경계획정협정〉과 이 협정에 부속하는 〈합의의사록〉 등이 포함된다.

정부는 대륙붕의 광물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1970년 1월 1일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제정, 5월 30일 그 시행령에 의하여 7개의 해저광구를 설정하여 외국석유회사들과 탐사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에 이의를 제기, 대륙붕경계선은 관계국간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며, 합의가 없는 한 국제법상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중복 부분에 대한 일본측 권리를 유보한다고 주장하고, 이 지역에 대한 탐사와 개발을 자제하라고 요구하였다.

일본측이 중복을 주장한 지역은 서남해의 5·7광구였다. 이에 정부는 한국이 설정한 광구는 국제법원칙에 따라 확정된 것으로 한국해안의 자연적 연장 범위 안에 있으므로 탐사와 개발을 자제해달라는 일본측 요구에 응할 수 없으나 문제해결을 위하여 전문가의 의견교환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1970년 11월부터 대륙붕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교섭이 시작된 이래 1차의 외상회담, 4차의 실무자회의와 5차의 실무소위원회를 거쳐 1973년 7월 4일 협정문안에 양측이 합의함으로써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협상과정에서 양국은 조광료(租鑛料) 및 세금의 납부방식과 공동개발회사의 법규 적용 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나, 1973년 4월 16일김용식(金溶植) 외무부장관과 오히라(大平正芳) 일본외상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석유 및 천연가스와 이와 더불어 생산되는 지하자원을 개발대상으로 한다.

② 한국이 〈해저광물자원개발법〉에 의하여 설정한 광구와 일본이 주권적 권리를 주장하는 중복 부분 약 8만4000㎢를 공동개발구역으로 한다.

③ 공동개발의 형태는 연간주도형으로 한일 양국정부가 지정한 민간기업에 의하여 추진되며, 양국 정부는 편의상 9개로 나누어진 소구역에 대한 조광권자를 협정발효 후 3개월 내에 지정한다.

④ 소구역의 양쪽 관련기업은 공동개발의 비용 및 이익분배방법 등에 관한 운영협정을 체결하며, 개발을 주도할 운영자는 일차적으로 양쪽 기업의 협의에 의하여, 이 협의가 성공하지 못할 때에는 정부간 협의에 의하여, 이 협의도 성공하지 못할 때에는 추첨에 의하여 결정한다.

⑤ 생산물 및 비용은 양쪽 조광권자에게 50:50으로 균분한다.

이 밖에도 조광권자의 탐사채취기간과 조광권자에 대한 세금, 기타 과징금의 부과문제, 경계에 걸쳐 있는 유전의 개발문제, 분쟁해결방법 등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으며, 협정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심의연구하고 당사자에게 권고하기 위하여 4인으로 구성된 정부간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한 · 일간의 협정체결은 1974년 1월에 이루어졌으나, 일본의회가 협정발효에 필요한 비준을 지연시켜 개발이 늦어지다가 1977년 3월 임시국회에서 동의안이 중의원을 통과하고 참의원에서는 회기시한 만료까지 처리되지 못하여 자동승인의 형태로 가결되었다.

중의원과 참의원은 대륙붕협정비준을 위한 일본국내 절차법인 ‘대륙붕공동개발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1978년 4월 7일과 6월 14일에 각각 통과시켰다.

이에 한일 양국은 1978년 6월 22일 동경(東京)에서 비준서를 교환, 1974년 협정을 조인한 이래 4년 5개월 만에 발효시켰다. 한일 양국은 협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실무협의체인 한일대륙붕공동위원회를 구성, 1978년 11월부터 1차 회의를 열어 실무적인 절차를 협의하고, 1979년 10월 2차 회의에서 탐사작업에 들어가기로 합의함으로써 1979년 10월 30일부터 제5·7광구에 대한 음파탐지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탐사결과가 여의치 않아 1985년 3월에 한일대륙붕공동위원회 제5차 회의가 열렸지만 대륙붕개발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더욱이 1982년 10월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협약’ 체결 이후 변화한 국제어업질서는 한일 양국에게 한일어업협정의 개정을 요구하게 하였다.

이후 한일양국은 대륙붕공동개발과 한일어업협정 등과 같은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바다의 영토를 확정짓는 협상에 임하였다.

1998년 초 일본은 국내정치상황을 이유로 기존의 협상과정을 원점으로 돌리고 1965년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 통보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국정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로 들어선 경제위기 속에서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협상은 재개되어, 1998년 9월 양국의 외무 장관이 어업협정을 서명하였다.

하지만 당시 어업협정문서는 어업협정 중간 수역 내의 독도가 어떠한 좌표로도 표기되지 않았고, 남해 먼바다에서도 한일대륙붕공동수역의 8/10을 일본에 고스란히 내주고, 나머지를 중간 수역으로 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이 드러났다.

참고문헌

『한국연감 1970∼1985』(한국일보사, 1971∼1986)
『동아연감 1971∼1986』(동아일보사, 197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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