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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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에서 1951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받아 큰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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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에서 1951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받아 큰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한 전투.
내용

1951년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될 무렵, 영국군 제29여단은 글로스터(Gloucester)글로스터(Gloucester) 연대 제1대대(이하 글로스터 대대)를 적성 부근에, 푸실리어(Royal Northumberland Fusiliers)푸실리어(Royal Northumberland Fusiliers) 연대 제1대대(이하 푸실리어 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 받은 벨기에 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고, 얼스터 소총(Royal Ulster Rifles)얼스터 소총(Royal Ulster Rifles) 연대 제1대대(이하 ‘얼스터 소총대대’)를 봉암리에 예비로 확보하여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국군 제29여단의 정면인 임진강 주변에서는 1951년 4월 22일 아침부터 여단의 정찰대와 중공군 간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4월 22일 22시경 글로스터 대대 정면의 가여울 일대로 중공군 1개 연대가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63군은 임진강 남쪽에 일부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영국군 제29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감악산 점령이 지연되자 예비사단을 투입해 공격제대를 재편성한 후 23일 자정 무렵부터 좌전방 글로스터 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에 밀려 적성∼신산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235고지(일명 ‘설마리 고지’)에 집결해 사주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24일 새벽에는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 제63군에 의해 포위당하는 위급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영 29여단은 적 중에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4월 24일 7시 30분에 필리핀 제10대대와 영 제8전차대대 C중대를 이용한 보전 협동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235고지 남쪽 4.8km까지 진출한 중공군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사기막 고개 부근의 도로 폭이 협소해 전차의 통과가 불가능함으로 인해 보전 협동 공격이 차질을 빚었다.

이에 여단장은 글로스터글로스터 대대장 칸(J. P. Carne) 중령에게 자력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여 증원부대와 연결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대장은 그간의 전투로 대대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어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여단장에게 현 위치에서 증원부대와의 연결과, 바닥나기 시작한 탄약과 식량 등의 추가 보급을 요청하였다. 글로스터 대대는 이날 밤에도 수차에 걸친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하든가 또는 중공군에 투항하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결정 권한을 위임하였다. 설마리 전투설마리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26일 D중대를 제외한 전 대대원이 포로가 된 것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1/3가량이 손실을 입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설마리전투는 6·25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실시된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례로 전사에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6·25전쟁사』제9권(군사편찬연구소, 2012)
『한국전쟁』중(국방군사연구소, 1996)
『임진강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91)
『한국전사』(합동참모본부, 1984)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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