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출생. 9세 때부터 아버지 전명준(全明俊)에게서 10여 년간 소리를 배웠고, 21세 때에는 전북 진안군 물목 매봉재 산중에 들어가 100일기도하고 2년 동안 소리를 닦았다. 그 뒤 산에서 내려와 홀로 수련하다가 28세 때 송우룡(宋雨龍)의 문하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하여 판소리의 기틀을 잡았다.
그 뒤 박만순(朴萬順) · 김세종(金世宗) · 이날치(李捺致) 등 선배명창을 수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42세 때 세상에 나가 공연활동을 벌이니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목이 양성(陽聲)이고 성량이 모자라 넓은 마당에서의 공연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음악성이 매우 치밀하고 변화가 무쌍하여 실내공연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소리의 리듬변화가 매우 다양하여 뛰어난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의 소리에 북을 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판소리이론으로 역대명창 가운데 첫손을 꼽았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았던 만큼 판소리의 역사와 이론에서 당시에 제일이었으며, 판소리평론에도 그를 누를 자가 없었다. 박만순 · 김세종을 통하여 고아한 동편제 판소리를 터득하였는데, 동편제 판소리를 통속화시킨 송만갑(宋萬甲)을 비판하였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두루 능하였으나 「흥보가」와 「심청가」를 잘 하였고, 특히 「심청가」에서 ‘범피중류(泛彼中流)’대목을 뛰어나게 잘 하였다고 한다.
그의 문하에는 정정렬(丁貞烈) · 신영채(申永彩)를 비롯하여 수많은 명창들이 거쳐갔으나 그의 소리를 이은 자가 드물다. 다만, 김원술(金元述)이 그의 「흥보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주로 지방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