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안양군은 성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정씨(貴人鄭氏)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 사건의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해 1504년(연산군 10) 정씨 및 봉안군(鳳安君)과 함께 안양군을 사사(賜死)하였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작(復爵)되었다.
안양군은 성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정씨(貴人鄭氏)이다.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 사건의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해 1504년(연산군 10)정씨 및 봉안군과 함께 안양군을 사사하였다. 1506년중종이 즉위하면서 복작(復爵)되었다.
묘역의 규모는 약 300여 평이다.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봉분은 단분이다. 부인 능성구씨(陵城具氏)와의 합장묘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상석 가까운 곳에 좌우로 허리 부분까지만 형상화한 동자석(童子石)이 있다.
상석 앞쪽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望柱石)ㆍ석양(石羊)ㆍ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봉분 오른쪽에 있다. 비신(碑身) 옆면에 ‘건좌병진(乾坐丙辰)’이라는 묘소의 방향과 건립 연대의 간지(干支)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호(年號)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묘역 앞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신종묵(愼宗默)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1976년이일형(李一珩)이 쓰고 김충현(金忠顯)이 전액(篆額)을 하여 건립하였다. 한편 이 묘역은 처음 지어진 자리가 아니라 1895년(고종 32)양주에서 묘역의 석물과 함께 이장해 온 것이라고 한다. 묘역의 형태는 조선 중기의 양식이다.
1520년에 부인의 상소에 따라 택지(擇地)하여 개장하도록 교지가 내렸다. 따라서 이 묘역 석물의 조성 시기는 1520년 경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