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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3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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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궤도 위를 달리는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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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기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궤도 위를 달리는 차량.
내용

공중에 가설한 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달린다. 우리 나라에서는 1898년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1969년 모두 철거되었다.

1974년에는 서울에 지하와 지상의 전기철도가 등장하였고, 이어 부산에도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지하철’과 ‘전철’로 불린다.

1972년 태백선의 일부 구간에 산업용으로 등장한 전기기관차는 점차 널리 보급되고 있어서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전차라 할 수 있다.

또, 앞으로 추진될 고속철도는 모두 전철화할 것이 확실하다. 이들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는 ‘전차’이지만, 보통은 1898년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70년 뒤에 없어진 서울·부산·평양의 시내 궤도 전기철도만을 전차라 부른다.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고 또 전기가 나오면서 서양에서는 수증기 대신에 전기를 이용한 교통기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다. 1834년 미국에서 전지를 사용한 모형전차가 나왔고, 이것은 1879년 독일의 베를린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여객수송용 전차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가지를 달리는 전차가 영업용으로 등장한 것은 1881년에 지멘스(Siemens,E.W. von S.)가 베를린 교외에 설치한 전차가 처음이다.

우리 나라에서 전차사업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경인철도 관계로 우리 나라에 와 있던 미국인들이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98년 2월 19일 미국인 콜브란(Collbran,H.)과 보스트윅(Bostwick,H.R.)은 우리 정부로부터 한성(지금의 서울) 시내에서의 전기사업경영권을 얻어 그 사업의 하나로 전차가 부설되기에 이른 것이다.

원래 이들 미국인은 1896년 처음으로 인천에 와서 그곳에 있던 같은 미국인 모스(Morse,S.F.B.)와 함께 한국으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얻은 일이 있다. 이들은 그 뒤 서울 서소문으로 옮겨와 살면서 정부로부터 서울 시내의 전차는 물론 전등과 전화사업 등에 대한 독점권을 얻은 것이다.

특히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자주 나갔는데 그때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이 따르게 되어 한번에 10만 원의 경비가 들 정도였다.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이러한 점을 강조하여 임금에게 경비를 절약할 수 있고, 또 편리한 근대문명의 이기를 하루속히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함을 강조하여 고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궁궐 안에 전등을 가설하고 있던 고종은 전기를 이용한 근대문명의 도입에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로 고종의 명에 따라 육군총장 이학균(李學均)은 콜브란 등과 교섭하여 1898년 2월 19일 전문 25조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자본금 150만 원 이상의 한미전기회사를 세워 전차·전등·전화의 독점권을 행사하기로 하고, 출자의 반을 고종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계약과 더불어 고종은 40만 원을 냈고 1904년 5월 말까지 35만 원을 추가로 출자한다는 약속어음을 발행하였다.

고종의 처음 40만 원 출자란 부동산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 계약은 모든 경영권을 미국인들이 독점하고 고종이 35만 원의 추가출자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이미 출자한 회사자산도 모두 몰수한다고 정하였고, 회사의 조직운영이 순전히 미국법에 따른다는 등 당시 불공정 관행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계약에 따라 서울의 첫 전차는 1898년 10월 18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2월 25일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1단계가 완공되었다.

전차를 움직여 줄 동력으로는 75㎾ 600V의 직류 발전기 1대를 도입하여 동대문에 발전소를 세웠다. 차량은 40명이 앉을 수 있는 개방식차량을 8대 수입하였고, 황실전용으로 고급차량 1대가 도입되었다. 전차의 운전사들은 일본 경도(京都)전차회사에서 경험 있는 일본인을 초청하여왔고, 차장은 한국인이 맡았다.

1894년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운행한 일본에 이어 1899년 음력 4월 초파일(양력 5월 17일)에 전차개통식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전차의 등장에 환호하였지만, 그 과정에는 불상사도 없지 않았다.

개통 직전의 1월에는 약 12m의 송전선 절도사건이 일어나자 그 범인으로 지목된 두 사람이 재판도 없이 참형을 받았고, 개통 1주일 뒤에는 탑골공원 앞에서 5살짜리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죽자 성난 군중이 전차 두대를 불태운 일도 있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일본인 운전수들은 호신용 권총의 휴대와 순경의 동승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유족보상 등을 걸고 파업 끝에 귀국해버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전차이용승객은 급속히 늘어나, 전차 노선은 같은 해에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졌고, 1900년 1월에는 구용산(지금의 원효로 4가)까지 다시 연장되었다. 1901년 7월에는 전차 노선은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의주로에도 가설되었으나 예상과 달리 이 노선만은 별로 사용되지 않아 몇 년 뒤 폐지하였다.

한편 일본세력이 점점 강하여지면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사업을 벌인 일한(日韓)가스회사는 1909년 콜브란으로부터 한미전기회사를 인수하였고, 이는 다시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칭되었다.

전차도 이와 함께 경영주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74만 원에 일본인에게 넘어간 한미전기회사의 매매과정에서 초기에 반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뒤에 고종은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콜브란이 회사를 일본인에게 넘기고 영국으로 이주해간 것은 일본의 압력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뒤 전차는 일제강점기 때 부산과 평양에도 가설되고 노선이 확대되면서 가장 중요한 시내 교통수단이 되어갔다. 8·15광복 후 자동차의 보급으로 버스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는 전차가 오히려 폭주하는 교통수요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1969년 철거되었다.

그 대신 1974년부터 전차의 다른 형태인 지하철과 전철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서울과 부산에 가설되어 확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성전기주식회사20년연혁사』(경성전기주식회사, 1929)
『서울600년사』 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1981)
『한국전기백년사』(한국전력공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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