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이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 사택에서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897년에 예배처로서 고딕양식의 벧엘예배당을 건립하였고, 배재학당·이화학당, 그리고 정동시병원과 약국소를 관할하며 한국의 선교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인들은 한말 계몽 운동과 3·1운동에 앞장섰다. 본당은 1979년에 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 성전으로 건축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순교자적 신앙과 선교 정신으로 민족과 교회를 섬겨 온 한국개신교 최초의 교회이다.
1885년 10월 11일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성찬 예식이 주1 자택의 응접실에서 거행되었다. 정동에서 거행된 성찬 주2은 ‘한국감리교’의 본질이자 교회 자체이다. 이에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교회의 창립일로 지키고 있다.
1885년 이래 정동 지역에 미국 북감리회의 선교 기지(mission station)가 만들어졌다. 선교사들의 주거지와 함께 정동제일교회, 시병원(施病院)과 보구여관(普救女館), 배재학당(培材學堂)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설립되어 정동은 한국 개신교의 발상지이자 한국 근대화의 구심점이 되었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 땅에 발을 내딛었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고, 배재학당의 초대 교장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순회 전도와 성서 번역, 문서 사업을 통한 복음 전도와 청년 운동에 힘썼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선박 충돌 사고로 순교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정동제일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된 최병헌(崔炳憲)은 목회 활동 이외에도 동양의 모든 종교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 성산명경』, 『 만종일련』 등을 저술하여 유교적 사상에 깊이 뿌리박힌 양반 지식인층에게 개신교를 조선의 사상과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가을 남대문 안 작은 한옥에 별도의 예배처를 마련하고 ‘벧엘’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후 1897년 12월 26일 현재의 위치에 고딕 양식의 벧엘예배당을 주3 이곳은 종교 행사는 물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교 행사와 주4, 공공 단체의 연설회와 토론회 등의 정치 행사, 시민을 위한 각종 문화 행사, 서양식 결혼식의 공간이 되었다.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수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하였다.
벧엘 예배당은 1916년 남녀를 구분하던 내부 휘장을 제거하고 노후한 예배당 북쪽을 주5 십자가형의 북쪽 날개 쪽이 확장된다. 1926년 또 한 번의 증축 공사로 60여 평(약 200제곱미터)이 늘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였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문으로 교육받은 학생들은 청년회(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중을 깨우치는 계몽 운동을 펼치고, 구국 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하 3·1운동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1918년 정동제일교회에 부임한 이필주(李弼柱) 목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사택에서 기독교계 민족대표 16명의 회합과 기미독립선언문의 서명이 이루어졌고 대중적 학생 시위가 계획되었다.
3월 1일에 민족대표인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朴東完) 전도사가 민족대표로 감옥에 갇히고 외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 전달을 주도한 김진호(金鎭浩) 전도사와 교회 오르간 송풍구에서 작성된 독립 촉구를 위한 유인물을 전달한 정득성 전도사가 구속되고 배재학당 학생들과 이화학당 교사 및 학생들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교우가 흩어지고 가을까지 정상적인 집회가 힘들었다.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 교인이던 유관순(柳寬順)은 고향 천안의 만세 시위 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사망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김종우(金鍾宇) 담임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벧엘 예배당이 파괴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예배당 중수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파괴된 예배당의 복구에 힘썼다. 벧엘 예배당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서 1977년 사적 256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 3월 8일 주일 오후에 운동권 학생들의 방화로 화재를 입게 되었으나 두 달여 만에 수리를 완료하였다.
2001년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2002년 부활절 예배를 벧엘 예배당 재봉헌 예배로 드렸다. 벧엘 예배당은 정동역사거리를 상징하는 19세기의 건물이자 모범적인 문화 유산 보존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도 예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1897년 정동제일교회의 청년회가 조직될 때 남성들의 ‘워른(Warren)회’와 여성들의 ‘조이스(Joyce)회’가 각각 조직되었다. 이와 별도로 1900년 11월 11일 장년층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보호여회’를 창립하고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교와 구제 사업을 표방하였다. 보호여회는 다른 지역, 다른 교회에서도 같은 명칭으로 조직되면서 오늘날 회원 100만 명의 ‘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로 발전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따라 창립 초기부터 수많은 교회 개척에 앞장섰다. 1958년 신앙전도부(1979년부터 개척전도회)가 조직되면서 국내 선교 사업이 보다 활성화되었다. 전도부 회원들은 교회 재정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1961년 노량진중앙교회(현 목양교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5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또한 국내 선교 위원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미자립 교회의 성전 건축비를 지원하고 젊은 목회자 부부 리트릿(retreat)을 개최하고 있다.
정동제일교회의 해외 선교 사업은 1965년 말레이시아 사라왁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창립 1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계획된 세네갈 선교 사업으로 1987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교회(그랑요프감리교회, 멤감교회)와 학교(존 웨슬리 기독학교)를 두 축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1995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지역에 알마티정동교회(현 아타감리교회)를 설립하고, 고려인을 위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6년 이래 ‘사랑의 집’은 지역 근로자들을 위하여 소비 주6을 운영하였고, 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중계동 봉사센터와 거여동 봉사센터로 이어지는 사회 봉사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1990년 4월 15일 설립된 사회 교육관은 사회 복지 사업을 통해 지역 사회의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며 지역 주민의 연대감을 조성하는 종합 복지 센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2년 10월 문을 연 아가페 클리닉은 낯선 한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일하면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이다. 매월 둘째 · 넷째 주 일요일 오후 사회 교육관에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해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한국인의 따뜻한 정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923년 한국 최초로 ‘하기아동성경학교’를 시작하여 한국 교회 주일학교 운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학생과 일반 청년을 바탕으로 ‘젊은이교회’를 신설하였다. 젊은이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청년운동인 엡윗청년회를 계승한다는 역사 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의 일꾼들을 세워가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순교자적 신앙과 선교정신으로 민족과 교회를 섬겨온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이며 한국 감리교회의 어머니 교회이다.